박스오피스 1위 순항 중
한국 영화계에 공포 장르의 감각을 새롭게 꺼내든 젊은 연출자가 등장했다. 영화 '살목지'를 연출한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이다. 단편 '함진아비'로 서울독립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며 이름을 알리고 '귀신을 부르는 앱: 영' 옴니버스 참여한 이상민 감독이 첫 단독 장편 영화 '살목지'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쇼박스
단편부터 장편까지 공포 장르를 일관되게 탐구해온 그는 이번 '살목지'를 통해 장르의 기본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작동 방식을 비틀어내는 연출을 선보였다.
지난 8일 개봉한 '살목지'는 기이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저수지에서 로드뷰 화면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포착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김혜윤, 이종원, 김준한 등이 출연해 미스터리한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인물들의 공포를 밀도 있게 담아냈다.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누적 관객 수 52만 명을 돌파한 이 작품은, 익숙한 공간과 감각을 뒤틀어 공포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관객을 제대로 홀렸다. 입소문을 타고 관람층이 빠르게 확장되면서, 단순한 장르 소비를 넘어 체험형 공포로서의 몰입감을 입증하고 있다.
이상민 감독의 영화에 가장 공들인 지점을 현실성 확보다. 가장 일상적인 풍경을 가장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살목지'란 공간을 선택했다.
"'살목지'를 선택한 건 공간이 주는 공포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저수지라는 공간이 우리한테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무서운 장소잖아요. 물귀신이라는 소재와도 잘 맞았고요. '이 공간이면 관객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충남 예산의 살목지는 이미 호러 마니아들 사이에서 섬뜩한 괴담으로 이름난 장소다. 실제 존재하는 저수지의 음산한 분위기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오는 과정은 작품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결정적 한 수였지만, 연출자 입장에서는 실존하는 공간을 다룬다는 사실이 숙제처럼 남기도 했다.
"실제 지명을 사용하는 건 솔직히 부담이 있었어요. 지역에 계신 분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었고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로드뷰 촬영을 하러 간 7명의 이야기'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으면서부터는 그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접근했죠."
로드뷰 촬영이라는 독특한 소재는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각 캐릭터가 저수지를 찾아야만 했던 명분을 제공한다. 이상민 감독은 직업적 특수성 위에 인물 개개인의 사적인 욕망과 사연을 덧입혀 극의 밀도를 높였다.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의 관계가 필요했던 배경에는 명확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캐릭터는 로드뷰 촬영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했어요. 촬영하는 사람, 컨트롤하는 사람, 보조 인력 등 실제 역할들을 기반으로 인물을 구성했고요. 각각이 같은 목적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그 공간에 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전 연인, 형제 같은 관계를 넣은 건 인물들이 서로에게 더 솔직해질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거든요. 그런 관계가 있어야 긴장감도 더 살아나니까요."
로드뷰 촬영팀의 리더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수인(김혜윤 분)은 극이 진행될수록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직면한다. 그가 겪는 공포는 단순히 외부의 존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옥죄는 과거의 기억과 닮아 있다. 감독은 수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인이 캐릭터는 죄책감을 중심으로 잡았어요. 물귀신 이야기가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설정이다 보니까, 왜 이 인물이 이 공간에 집착하는지 고민하다가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죄책감'으로 감정선을 만들었습니다.원래는 어릴 때 물에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서 물 자체를 두려워하는 인물로 설정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 공간에 가는 것도 꺼려하지만,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가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촬영을 진행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겼는데, 그 사람이 연락이 안 되면서 죄책감을 계속 안고 가는 인물이라고 봤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수인이가 계속 가라앉아 있는 상태, 죄책감을 느끼는 상태로 끌고 가고 싶었어요.이 감정이 관객을 끌고 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저러는지 궁금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에 스스로 드러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쇼박스
'살목지'는 친절한 설명 대신 관객 스스로가 상황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을 취한다. 눈앞의 사건은 즉각적으로 보여주되 사건의 본질은 감춰두는 완급 조절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 것이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연출 의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설명해야 하는 정보와 숨겨야 하는 정보의 기준을 명확히 나눴어요.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장치들은 대사나 장면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되, 세계관의 핵심이나 감정선은 후반부에 드러나게끔 설계했죠. 직관적인 사건들 속에서도 정작 진실이 무엇인지는 관객이 계속 헷갈리게 만드는 것, 저는 그 지점이 오히려 몰입을 높이는 장치라고 생각했거든요."
'살목지'의 공포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과거의 원한이나 복수라는 전개 대신, 마치 재난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악의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귀신의 사연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의도였습니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악의가 더 무섭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저러는 거지?'가 아니라 '그냥 잘못 걸렸네' 그 감정이 더 큰 공포라고 느꼈어요."
영화는 현대인에게 가장 친숙한 기술인 GPS와 로드뷰를 공포의 매개체로 전복시키며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와 모션 디렉터, 고스트 박스 같은 장비들은 사방을 감시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넓은 시야는 인물을 더욱 고립시킨다.
"촬영에서는 360도 카메라나 부감샷 같은 시도를 많이 했어요. 저수지의 넓은 공간에서 인물이 작게 보이면, 공간이 인물을 압도하는 느낌을 줄 수 있거든요."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저수지의 풍광 속에 기괴하게 솟은 돌탑은 그 자체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소망과 저주가 맞닿아 있는 돌탑 설정을 통해 극의 구조를 탄탄히 다졌다. 그가 설계한 공포의 형상과 장치들은 철저히 인물의 심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영화는 돌탑이라는 설정이 중요한데, 저는 그걸 '소원을 들어주는 장치'로 생각했어요. 죽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결국 귀신을 불러내는 구조, 그 연결이 핵심이었죠."
흔히 공포 영화의 안전지대로 여겨지는 대낮의 환한 빛조차 '살목지'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무대가 된다. 이 감독은 관객이 숨을 돌릴 틈을 주는 대신, 오히려 밝은 시야 속에서 저수지라는 공간이 인물들을 서서히 집어삼키는 과정을 집요하게 묘사했다. 도망칠 곳 없는 탁 트인 공간에서 관객이 느낄 무력감은 철저히 계산된 결과였다.
"낮 장면에서도 공포가 유지됐으면 했어요. 관객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못 받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귀신이 계속 핑계를 만들어서 인물들을 물가 쪽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로 연출했어요. 예를 들면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도, 물소리나 이상한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점점 물가로 가까워지게 되는 식이에요.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극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사운드가 주는 압박감은 공포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다. 이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과 똑같은 청각적 공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아주 작은 소품의 소리까지 세밀하게 조율했다.
"사운드는 '언제 고요해질 것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극장에서 모두 숨죽이고 한 장면을 보는 그 순간이 공포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서요. 물소리나 돌 부딪히는 소리도 현실적이기보다는, 낯설고 날카롭게 들리게 만드는 데 집중했고요."
이상민 감독은 '살목지'가 단순히 장르 팬들만 향유하는 전유물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공포라는 외피 속에 촘촘하게 설계된 드라마의 층위를 강조하며, 보다 넓은 층의 관객들이 이 기이한 여정에 동참하기를 권했다.
"이 영화는 무서운 것뿐만 아니라 서스펜스와 스펙터클도 있다고 생각해요. 공포를 좋아하는 분들은 그대로 즐겨주시고, 공포를 어려워하는 분들도 미스터리나 심리적인 재미를 따라오면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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