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선생님, 신세 많이 졌습니다”…후배들이 짊어진 70년의 빚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1.29 10:12  수정 2025.11.29 10:12

“하고 싶은 건 연기밖에 없다.”


지난 5월, 기력이 쇠해 병상에 누워있던 90세의 노배우의 말이다. 거동조차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다.


ⓒMBC

지난 28일 방영된 MBC 추모 특집 다큐멘터리 ‘배우 이순재, 신세 많이 졌습니다’는 이 짧은 발언을 중심으로 고(故) 이순재의 70년 연기 인생을 복기했다. 당초 생전 고인의 허락을 받고 그의 연기 인생을 정리하는 다큐멘터리로 촬영됐으나 이순재의 급격한 병세 악화로 다큐 제작은 중단됐다. 다큐멘터리는 그가 영면에 든지 3일 만에 추모 다큐로 다시 만들어졌다.


방송이 공개한 투병 당시의 영상은 이순재가 배우라는 직업을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생전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연기하고 싶다. 매 작품이 유작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말해왔다. 병상에서 대본을 놓지 않았던 모습은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그에게 대본 암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배우로서 존재하는 자격 요건이자 동료들에 대한 예의였다. 육체적 한계 앞에서도 그는 은퇴한 원로가 아닌 현역 배우이기를 고집했다.


소속사 이승희 대표는 “왼쪽 눈이 안 보이고, 오른쪽 눈도 100% 다 보이는 건 아니셨는데도 전과 똑같이 연기 훈련을 하시고, 더 해야 한다고 하셨다”며 “저나 매니저에게 큰 소리로 (대본을)읽어달라며, 읽어주는 것을 외우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제일 가슴 아팠다”고 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함께 한 배우 카이는 “작품 안에서는 몸으로 행동으로 이렇게 더 해볼까, 더 망가져볼까 공연 때마다 많이 짜오셔서 던지는 모습을 경험했다. 관객들의 반응과 웃음 가운데 더 큰 에너지를 얻으셔서 선생님이 무대에 살아계시는 걸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느꼈다”고 했다.


ⓒMBC

건강 악화로 공연을 할 수 없는 컨디션에도 관객과의 약속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제작사 대표 박정미는 “선생님이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컨디션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하셨고 말씀도 제대로 못 하셔서 선생님께 울면서 빌었다. 오늘 공연을 취소하자고”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샀다. 카이는 “선생님께서는 한 번의 무대가 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나 때문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1시간 반 가량의 공연을 다 마치시고 그 길로 응급실로 가셨다”고 털어놨다.


기록된 그의 필모그래피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정통 사극의 왕부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까지 경계가 없었다. 방송에 담긴 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배우는 그저 연기로 말할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자신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대중이 원하고 작품이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변신했다. 이러한 유연성은 그가 9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주연 배우로 활약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 온 과정이 영상 곳곳에 묻어났다.


방송의 말미, 고인과 예능 ‘꽃보다 할배’, 드라마 ‘이산’ 등을 함께 한 인연으로 내레이션을 맡게 된 이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 한 마디는 프로그램의 제목이자, 후배 배우들과 대중이 고인에게 전하는 부채감의 표현이었다. 70년간 쉼 없이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닦아준 이순재의 생애는 그 문장 하나로 요약됐다.


한편 이순재의 영결식은 27일 오전 5시30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고인의 마지막 길에는 김영철, 유동근, 최수종, 박상원, 이원종, 정동환, 정일우, 정준하, 정준호, 정태우와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인연 있는 후배들이 함께 했다. 정부는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난 25일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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