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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의 허재’ 노진수를 기억하십니까


입력 2009.02.09 11:52 수정        

´공격·리시브·서브능력´ 삼박자 갖춘 올라운드 플레이어

올드팬들 노진수 떠올리며 ´두뇌 플레이어´ 그리움 달래

1990년대 실업배구대회는 ‘백구의 대제전’이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농구의 ‘점보시리즈’와 더불어 동계시즌 구기스포츠를 양분했던 배구는 대통령배 배구대회를 통해 그 흥행에 정점을 찍었다.

한양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을 포함한 대학부와 고려증권(해체), 현대자동차서비스(現 현대캐피탈), 한국전력(現 KEPCO45), 상무, 럭키금성(現 LIG 손해보험), 대한항공 등 실업팀이 백중세를 이루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종화, 노진수, 이상렬, 장윤창, 정의탁, 임도헌 등 실업과 대학배구의 에이스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겨울 배구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하종화와 함께 한 노진수(오른쪽). 하종화와 함께 한 노진수(오른쪽).


농구는 허재, 배구는 노진수?

이 가운데 1992년 대통령배 배구선수권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외인부대´ 상무 배구단은 팬들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군 복무로 인해 많은 스타들이 한 번쯤 거쳐 가는 상무지만, 1992년 당시의 전력은 상무 배구단 역사상 최강이었다. 노진수(43·현 대구여고 감독)를 필두로 신영철, 이재필, 오욱환, 김동천 등 파워와 정교함이 돋보인 이들은 상무 배구단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최강이라 여겨졌던 현대자동차서비스와 고려증권에 단 1경기도 빼놓지 않고 승리, 그 해 대통령배대회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상무는 하종화, 마낙길, 이성희 등이 입대하며 ‘스타군단’의 위용을 뿜었지만, 이때와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1992년 당시 팀 중심에 있던 선수는 다름 아닌 노진수였다.

공격과 수비 모두 당대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며 명성을 떨쳤고, 특히 상무 시절은 그의 전성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상무의 무게감과 안정감은 노진수가 있어 가능했다는 평가는 아직도 공감을 얻고 있다.

사실 그는 고교시절부터 ‘배구천재’라는 찬사를 받았다. 경북사대부고 시절에는 1학년임에도 불구,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각종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명 ‘스카이 서브’라고 불리는 스파이크 서브를 국내에서 가장 먼저 시도해 성공했던 것도 다름 아닌 노진수였다. 공격성공률, 리시브, 서브 등 어느 하나도 손색이 없었던 그는 배구계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특히, 그의 뛰어난 두뇌 플레이는 ‘배구를 알고 한다’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그의 진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전에서 드러났다. 당시 독일과 맞붙은 국가대표팀은 세트스코어 2-2로 팽팽히 맞선 마지막 5세트에서 11-14로 밀려 패색이 짙었다. 설상가상으로 주 공격수 마낙길 마저 부상으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국가대표에는 노진수가 있었다. 노진수는 독일의 범실을 틈타 회심의 역전을 알리는 스파이크로 17-15의 역전을 일궈냈고, 이를 바탕으로 기세를 올린 국가대표팀은 올림픽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시 ‘농구에 허재가 있다면 배구에는 노진수가 있다’고 할 만큼, 그의 활약은 국가대표에서나 소속팀에서나 절대적이었다. 상무 전역 이후 소속팀 현대자동차서비스로 복귀한 노진수는 ´1993-94 대통령배 전국 배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며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면서, 늘 배구팬들 곁에만 있을 것 같았던 노진수는 ‘슈퍼리그’ 등장 이후 일선에 물러났다.


노진수 ´소리 없이 강한 지도자´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은 모교 성균관대학교였다.

코치로서 후학 양성에 힘썼던 노진수는 1996년 3월, 감독 대행을 거쳐 그 해 7월 정식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정평호(KEPCO45), 곽승철(성균관대 코치) 등을 앞세워 ´2001 전국 대학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라이벌 한양대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스타플레이어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깨고, 보란 듯이 모교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승승장구했다.

이런 노진수를 프로구단에서 가만히 둘 리는 만무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팀은 LG화재(現 LIG 손해보험). 모교 감독으로서 우승을 이끌자마자 프로무대에 뛰어 든 노진수는 5년간 대학배구 감독 경험을 살려 지도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과 무관하게 당시 ´슈퍼리그´를 이끌던 삼성화재의 벽은 너무 높았다.

손석범, 이동훈, 이영수를 앞세운 2002년 슈퍼리그에서 삼성화재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2004년 2월, V투어를 끝으로 지휘봉을 1년 선배 신영철(당시 삼성화재 코치)에게 넘겨줘야했다.

이후 노진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신만근 당시 여자배구대표팀 코치와 더불어 중국배구팀 지도자로 진출한 것. 중국이 자국 지도자들을 제쳐놓고 한국지도자들을 영입하는 것은 북경에서 활동 중인 농구, 태권도 등 타 종목 한국인 지도자들이 보여준 성실성 때문이다.

또한, 2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중국 전국체전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이에 노진수는 북경시 성인대표팀 코치를 맡으며, 1년간 중국무대에서 ‘배구 한류’ 바람을 일으켰다.

중국무대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노진수에게 이번엔 출생지 상주와 가까운 대구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대구여자고등학교 배구부였다. 연락을 받은 그는 고향 팀에서 부른 것이기에 주저 없이 감독직을 수락했다.

여자팀을 맡은 것이 처음이었다는 그는 기본기부터 탄탄히 다듬어 훌륭한 선수들로 길러내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이러한 노진수의 노력은 전국체전 3위의 성적으로 나타났고, ´소리 없이 강한 배구부´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노진수는 선수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린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배구의 프로화가 이뤄진 현 시점에서 ‘포스트 노진수’로 불릴 만한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못내 아쉽다.

배구 팬들은 노진수가 코트에서 펄펄 날던 1992년 올림픽 예선 독일전을 떠올리며 V리그에서나 국제무대에서 ‘파워 플레이어’가 아닌 ‘두뇌 플레이어’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파워 일색인 V리그 판도 속에 유독 그가 그리운 것은 노진수만의 독창적인 배구 스타일 때문이다. 향후 감독으로서, 혹은 배구계 야인으로서 V리그 발전을 위해 발품을 팔 노진수에게 또 다른 노진수를 기대하고 있다. [데일리안 = 김현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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