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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㉓] 매국노의 국익


입력 2023.03.21 14:01 수정 2023.03.21 14:01        데스크 (desk@dailian.co.kr)

1904년 2월 18일 오후에 대한제국 외부대신서리 이지용은 일본공사관을 방문하였다. 남산 중턱에 자리한 일본공사관에서는 바로 앞의 일본인 거주지를 비롯해 진고개 일대의 명례동(현재 명동) 일대까지 한눈에 보였다. 목조로 서양풍의 2층 건물로 지은 일본공사관은 언 듯 보기에 그 외관이 마치 다른 서구 열강의 공사관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서양 건축 양식을 따라 했을 뿐 다른 공사관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주한 일본 공사 중에는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사관의 규모를 키우고 장식을 화려하게 해야 한다고 요청할 정도였다.


경성 일본 공사관 원경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유리건판 GF0888 / 흰색 원은 필자가 표시) 경성 일본 공사관 원경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유리건판 GF0888 / 흰색 원은 필자가 표시)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무리하게 전쟁을 준비하면서 사실상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전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관 증축에 예산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정동 등에 자리한 서구 공사관 특히 러시아 공사관 등은 멀리서도 확연히 그 외견을 구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서울을 소개하는 주요 사진의 배경으로도 사용될 정도였다.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목조로 지은 일본공사관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비교가 되었다. 일본은 목조 건물 외벽에 석회 등을 발라 회색 벽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석회로 덧칠한 일본공사관은 외견상 서양 건축물처럼 보였다.


주한 일본공사관 지도 (출처 국가 기록원, <일제시기 건축도면 콜렉션>) 주한 일본공사관 지도 (출처 국가 기록원, <일제시기 건축도면 콜렉션>)

일본이 이토록 외견에 신경을 쓴 것은 역설적으로 전쟁에서 한국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이 병력과 무기 등을 전선에 보내기 위한 한국을 통해 보급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처럼 한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보급로를 위협할 경우 일본은 전쟁 수행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보급로를 확보한 상태였다. 이러한 차이는 만일 전쟁이 소모전으로 이어질 경우 일본의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전쟁 수행 계획 중 특히 병참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한국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일본군의 의병 처형 삽화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904년 6월 25일) 일본군의 의병 처형 삽화 (출처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904년 6월 25일)

실제 전국에서 의병이 거의[擧義]하면서 철로를 파괴하고, 전신선 등을 절단하면서 일본군의 작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철도 등 보급로를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해 의병을 학살하였다. 일본군이 타국인 한국에서 의병을 학살하는 것은 분명 주권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허용될 수 있었던 것은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사실상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정서’ 체결을 추진하였다. 일본이 내세운 논리는 ‘동양의 절박한 시국’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원하던 일본 내 망명자 송환까지 들어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가 의정서 체결에 회의적일 경우 군대를 동원해 서울을 점령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다만, 이때 일본이 우려한 것 중의 하나는 고종이 아관파천처럼 프랑스 공사관 등으로 피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돌발 상황은 일본의 초반 전쟁 수행에 매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의도를 한국 정부 내에서 전달하고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당시 한국 주재 일본 공사가 고른 대상은 이지용 등 당시 한국 정부 내 주요 고관이었다. 1903년 12월 31일 이지용은 외부대신서리에 취임하여 일본에 본격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대한제국의 국익을 가장 우선해야 하는 외부대신이 오히려 정부 내 내밀한 사항까지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지용뿐만 아니라 고종 주변의 많은 관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각종 정보를 비롯하여 국익에 관련된 내용을 외국에 넘겼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본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한국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명의로 6개 조항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지용이 일본으로부터 이른바 ‘운동비’ 명목으로 받은 돈은 1만 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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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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