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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80>] 에필로고 : 위대한 알코올중독자


입력 2023.02.03 14:01 수정 2023.02.03 14:01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80화 에필로그 : 위대한 알코올중독자


그 후로 2년이 지났다.


4월의 어느 날, 노란 개인택시 한 대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상춘객들을 지나치며 벚꽃터널을 내달렸다. 택시 꽁무니에 먼지 대신 꽃잎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택시 안에선 이문세의 노래 ‘알 수 없는 인생’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벗겨져 안경 쓴 얼굴이 더욱 길어 보이는 이철백이 꼿꼿한 자세로 핸들을 잡았고 조수석에선 방선희가 침통하게 앉아있었다. 이철백은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 얼마나 살아봐야 할까요 /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 시간을 되돌릴 순 없나요 / 조금만 늦춰줄 순 없나요 / 그 시절 지난날이 그리워요.


문득 이철백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T.S 엘리엇은 그의 장시 ‘황무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라고 역설적으로 화사하게 부활하는 4월을 찬미했다. 하지만 백화난만한 4월이 액면 그대로 잔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이철백과 방선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석규는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었고 그 곁을 박미옥이 지키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아들 정우와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지우도 함께 있었다. 김석규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벌써 석 달 째 기계장치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갔다. 의료진은 더 이상의 연명치료가 무의미하다며 보름 전부터 박미옥에게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2년 6개월 전, 김석규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교도소 철문을 나설 때만 해도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이 얼마나 비등한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국가와 언론에 의해, 낮에는 고상한 금주운동가 행세를 하고 밤에는 개처럼 술을 마시는 이중생활을 하며 금주운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지만 김석규는 결백했으므로 그런 평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석규는 동네 노인들이 슬금슬금 자신을 피해 다니고 박미옥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을 때 역시 크게 개의치도 서운해 하지도 않았다. 긴급 체포된 이후 석방될 때까지 김석규는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격리된 외톨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피도 아내와의 이혼도 이전과 달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반국가사범과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나락에 떨어질 뻔했다가 석방되었으니 예상치 못하게 얻은 자유는 그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김석규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억울함에 진저리를 쳤다.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국가와 언론,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감정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석규는 폭음을 일삼았다. 술에 취하면 강동욱의 계략에 빠진 자신을 한탄하고, 또한 국가의 부도덕성에 대하여 울분을 토했다. 그러다가 다시 알코올중독이 재발했는데 이번엔 알코올성 편집증이 아닌 알코올성 간경화였다. 그게 원인이 되어 간성혼수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이철백에 의해 발견된 것이었다.


박미옥은 김석규를 재차 알코올중독으로 내몬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자책했다. 물론 지금은 재결합한 상태지만 김석규가 힘들어 할 때 곁을 지키지 못하고 이혼함으로서 사실상 방치한 것이 재발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철백은 그렇게 따지려면 자신의 책임이 더 중하다며 김석규가 시골집에 혼자 있는 동안 위로한답시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함께 술잔을 기울인 죄가 더 크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방선희가 그 술과 안주를 자신이 마련해 주었다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던 중에 도착한 임봉식과 한종탁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죄를 물으려거든 자신들에게도 같이 물어달라고 가슴을 탕탕 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말을 잘못 꺼냈네요.”


박미옥이 얼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한종탁은 손수건을 꺼내 박미옥에게 건네주었다.


박미옥은 한종탁을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종탁은 정신병원에서 금주에 성공한 후 김석규의 뜻을 받들어 금주운동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금주운동본부는 김석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단체로서 설립취지 및 목적 제1호에 김석규의 명예회복을 명시해 두고 있었다. 김석규는 결코 파렴치한이나 개망나니가 아니라 순수하고 열정적인 금주운동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홍보하는데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하지만 국내 여론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국과 언론의 합작으로 김석규에게 뒤집어씌운 부정적 이미지는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기만 했다. 그래서 한종탁은 아예 방향을 틀어서 외신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외신은 한때 뉴욕타임즈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까지 했던 김석규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고 있었다. 김석규의 빛나는 금주투쟁을 기억하고 있었고 당국의 탄압과 언론의 왜곡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김석규는 외신의 객관적인 조명과 한종탁의 로비에 힘입어 한국인 최초로 위대한 알코올중독자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바로 알코올중독자에서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조지부시 등이 헌액되어 있는, 알코올중독자를 기리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김석규는 의식불명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어 박미옥이 대리 수상하러 뉴욕에 다녀왔었다.


이윽고 의료진이 김석규의 병실에 들어섰다. 주치의 이희수는 마지막으로 김석규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 혹시라도 모를 소생 가능성을 한 번 더 타진해 보는 듯했다. 사람들이 이희수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에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희수는 사람들의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흡기 제거하기 전에 작별인사들 하세요.”


이희수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핼쑥하고 창백한 얼굴의 김석규는 곧 이승을 떠나야 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 미안해. 잘 가.”


이철백이 김석규의 수척한 손을 잡고 말했다. 이철백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고생 많았다. 석규아. 영원히 잊지 않을께.”


임봉식이 반대편으로 가서 김석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임봉식은 볼을 씰룩거리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이어 한종탁이 다가가 이철백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거렸다. 뒤돌아서는 이철백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석규아. 네가 못다 이룬 꿈 반드시 내가 대신해 줄게.”


한종탁이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묵상에 잠겼다가 김석규의 손을 꼭 쥐고서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스스로 결의를 다지는 듯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보 미안해.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정말 잘 할께. 사랑해. 잘 가요.”


마지막으로 박미옥이 김석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염없이 흐르는 박미옥의 눈물이 김석규의 이마에 떨어져 내렸다. 정우와 지우도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엄마의 눈물을 보고는 함께 굵은 눈물을 흘렸다. 방선희가 다가가 박미옥을 꼭 껴안아주었다. 박미옥은 뒤돌아서서 방선희와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두 여인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이희수가 드디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김석규는 정물처럼 고요한 얼굴 그대로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빠, 안녕.”


지우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문득 굳게 감겨있던 김석규의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바짝 마른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


그동안 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를 사랑해주신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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