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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대통령만 중한가…민폐시위로 고통 받는 기업인 이웃들


입력 2022.12.04 09:00 수정 2022.12.04 09:00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전시효과' 노리고 기업인 집 인근 주택가 시위 빈발

고성과 비난, 선정적 현수막 등으로 애꿎은 주민들만 고통

은마아파트 재건축위 일부 주민들, 한남동 주택가에서 3주째 '민폐시위'

기업인 집 앞에서 삼겹살에 술판…배드민턴장 건설 요구 등 '갑질시위'도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C노선 우회를 주장하는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시위대가 서울 한남동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은마 재건축 추진위원회 유튜브 채널 동영상 캡처.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C노선 우회를 주장하는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시위대가 서울 한남동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은마 재건축 추진위원회 유튜브 채널 동영상 캡처.

용산 대통령 집무실과 전직 대통령 사저 반경 100m 이내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안이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다. 아직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통과가 남았지만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한 사안이라 앞으로 용산 대통령실 앞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 인근 시위로 인해 고통 받던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비슷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전시효과가 큰 대기업 총수나 공직자의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당사자는 물론, 해당 사안과 전혀 무관한 이웃 주민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위, 10km 떨어진 한남동 주택가에서 시위…왜?


서울 한남동 주택가에서는 지난달 12일부터 3주째 지속된 수백명의 구호 소리와 함성으로, 거주하는 시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


대형버스에서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라는 피켓과 현수막을 든 이들이 쏟아져 내려 도로에서 행진하며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행진 중 곳곳에서 멈춰 마이크를 든 사람의 통솔에 따라 “은마 관통 결사 반대” 등의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친다. “함성”이라는 구호에 다같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종종 도로가 시위대로 가득 차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만들어진다.


1시간에 세 번 이상 소음 기준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교묘히 피해가려는 듯 교통 방해와 소란 행위를 적절히 섞는 패턴을 반복해 경찰 개입도 불가능하다.


이들은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가 모집한 시위대다. GTX-C 노선의 은마아파트 하부 통과를 반대한다며 매일같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국토부의 공식 견해와 건설 전문가들 및 시공사의 설명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수정안을 내놓으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시위 장소인 한남동 주택가가 은마아파트에서 무려 10km 가까이 떨어진 곳이라는 점이다.


공사 예정지인 은마아파트도,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도, 공사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건설 사옥도 아닌 GTX-C 사업과 무관한 한남동 주택가로 굳이 관광버스까지 타고 와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의 타깃은 한남동에 위치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자택이다. 현대건설이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이니 정 회장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일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출근해 업무를 본다.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의 시위 시간대는 주로 직장인들이 출근한 이후인 대낮이다. 심지어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가 한남동 시위를 시작한 12일부터 사흘간 정 회장은 글로벌 재계 협의체 ‘B20 서밋’ 참석차 인도네시아 발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의 소란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GTX와는 전혀 관련 없는 한남동 주민들이다.


주민들은 매일 집 주변에 가득한 거친 비방글과 시위 소리로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자녀 교육에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 지역 빌라 관리사무소 한 직원은 “시위대가 동네 주민들의 생활을 방해하면서 주민들의 민원이 수십 건씩 들어온다”고 하소연했다.


이재용 회장 집 앞 '음주‧삼겹살 폭식', 이명희 회장 집 앞 '갑질시위'까지


전시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며 기업인의 집 인근 주택가에서 시위를 벌이며 애꿎은 주민들만 희생양으로 삼는 ‘민폐시위’ 사례는 이전에도 종종 있어왔다.


2020년 5월에는 적폐청산국민운동이라는 시민단체가 배드민턴장을 무상으로 지어달라며 서울 한남동 이명희 신세계 회장 자택 앞에서 수차례 집회를 벌였다.


이마트가 매입한 부지에 과거 배드민턴장이 있었으니 이마트가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구청에서 행정 허가도 나오지 않아 기업이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요구를 들고 기업 회장 집 앞에서 막무가내 시위를 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배드민턴 동호회와 관련도 없는 단체였다.


삼성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공동대책위원회가 2020년 5월 24일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음주가무' 집회를 벌인 뒤 유튜브에 올린 영상. 공대위 유튜브 채널 '연대TV' 동영상 캡처. 삼성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공동대책위원회가 2020년 5월 24일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음주가무' 집회를 벌인 뒤 유튜브에 올린 영상. 공대위 유튜브 채널 '연대TV' 동영상 캡처.

비슷한 시기 서울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는 ‘삼겹살 폭식 투쟁’이라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졌다. 한 시민단체가 삼성 해고노동자와 연대하겠다며 이 회장 자택 앞에서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것이다. 심지어 기타를 치고 노래까지 불렀다. 이웃 주민의 민원으로 공무원이 출동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고 당당했다.


이 장면은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네티즌들은 ‘도 넘은 민폐’, ‘저질스럽고 천박한 시위’, ‘시위를 하려면 상식적으로 하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올해 초에도 CJ대한통운 노조의 파업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민주노총 택배노조 150여명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재현 CJ회장 자택을 타깃으로 삼았다. 이 회장 자택이 위치한 서울 장충동 주민들은 시위대의 소란으로 조용한 일상을 포기해야 했다.


지난 5월에는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를 중심으로 소액주주들이 서울 삼성동 이준호 NHN 회장 자택 앞에서 주가 하락에 항의하며 “주주에게 사죄하라”고 구호를 위치는 등 소란을 피우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쳤다.


그밖에 2019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집 앞에서 벌어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금속노조 시위, 2018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자택 앞에서 열린 전국금속노동조합원 시위 등도 전시효과를 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강요한 ‘민폐시위’의 사례다.


합리적 시위 문화에 대한 준거 필요…타인 배려하는 시위문화 정착해야


기업인 못지않게 지명도가 높은 공직자를 이웃으로 둔 주민들이 고통 받은 사례도 있다. 서울시의 새로운 광역자원회수시설 입지 후보지로 마포구 상암동 일대가 선정되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9월부터 오세훈 서울시장 자택 앞에서 한달여간 시위를 진행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시위대의 소음으로 자양동 주민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다.


서울시 김혜영 시의원은 지난 18일 시의회에서 “마포구도 아닌 서울시청도 아닌 시장이 살고 있는 집으로 와서 주변 주민들을 괴롭히는 시위는 절대 공감 받을 수 없다”며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 건전한 집회‧시위 문화가 확산‧정착되기를 바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기업인‧공직자 집앞 민폐시위는 문재인 전 대통령 퇴임 후 양산 사저 앞에서 벌인 극우단체들이 고성과 소란으로 양산 주민들의 일상을 파괴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문 전 대통령과 양산 주민들의 일상은 집시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회복되겠지만, 유명 기업인이나 공직자와 이웃한 주민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또 다시 고통 받게 될지 모른다.


전‧현직 대통령 집무실이나 사저 인근에서의 시위만큼 강력한 규제를 민간 부문까지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시위 문화에 대한 준거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다른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도 존중하는 시위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한남동의 한 주민은 “기업인의 이웃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죄인가? 자신들의 권리가 소중하다면, 집에서 평소대로 일상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이곳 주민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점을 시위대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누구도 타인의 사생활 평온을 방해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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