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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의 은퇴일기⑩] 시간 앞에 장사 없더라…목계나루와 인생


입력 2022.10.11 14:09 수정 2022.10.12 09:53        데스크 (desk@dailian.co.kr)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문우들과 함께 충주지역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탑평리 7층 석탑, 충주 고구려비, 탄금대 등을 둘러보았는데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목계나루였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강물만 유유히 흘러가고 있어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아 허전하고 씁쓸하기만 했다.


충주 탑평리 7층 석탑ⓒ 충주 탑평리 7층 석탑ⓒ

목계나루는 고려 시대부터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로 물길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전성기에는 800호 이상 되는 큰 도회지로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여 마포 다음가는 한강의 주요 포구였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젓갈류, 생활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싣고 온 물건들은 내륙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도 문경과 상주까지 팔려나갔다. 한강의 최대 포구로 정선 아우라지 뗏군, 마포의 소금 상인과 같은 팔도장사꾼의 장터로 뱃일하는 인부만 500여 명이나 되어 언제나 붐볐다고 한다. 요즈음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의 모습을 보면 그 당시 목계나루터의 풍경이 대강 짐작이 간다.


마을에는 여각과 객주, 배로 나르는 물건을 흥정붙이는 사람인 '선주인'(船主人), 마구간을 갖춘 주막집인 '마방' 등이 있었으며,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곳이라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권번'이라는 기생학교까지 생겼다. 또한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계별신제와 목계 뱃소리와 같은 지역 특유의 전통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목계나루에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세곡을 보관했다가 남한강을 이용해서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조창의 하나인 가흥창이 있었다. 전국 아홉 곳에 있는 조창에는 적게는 4000 섬 많으면 4만 섬을 보관하였는데 비해, 가흥창은 8만 섬을 보관하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목계나루 인근 강배체험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물건을 싣고 나르던 짐배의 모습ⓒ 목계나루 인근 강배체험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물건을 싣고 나르던 짐배의 모습ⓒ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임산물이 집산되어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큰돈을 번 거상巨商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번창했던 옛 모습은 간곳없고 장마로 인해 강변에는 수양버들 가지만 물속에 휩쓸리며 안간힘을 다하여 매달려 있다.


목계나루도 세월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928년 충북선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끊기면서 규모가 크게 줄었다. 1973년에는 팔당댐이 완공되고 목계대교가 놓이면서 나룻배마저도 사라졌다. 다만 인근에 있는 강배체험관에서 더 이상 소용가치가 없어진 나룻배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을 사진과 조형물로만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장마로 강물이 많이 흐르는 목계나루터. 충북선이 개통되고 목계대교가 건설되어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 장마로 강물이 많이 흐르는 목계나루터. 충북선이 개통되고 목계대교가 건설되어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에서 나뒹굴던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강나루 흔적마저도 모래를 파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늘 북적거리던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번성했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지금은 매운탕 집과 수석 가게들이 한적한 풍경을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 입구에는 그 시절의 애환을 노래한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만 외롭게 서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중략…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떠돌이 장돌뱅이 삶의 공간인 목계를 배경으로 민중들의 강한 생명력을 토속적인 언어를 통해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으로 자연에 비유하여 운명론적으로 노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쓸쓸히 뒤안길로 사라진 목계나루를 보면서 비록 나이는 들고 탄력은 떨어졌지만, 뒤처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목계나루터 입구에 세워진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목계나루터 입구에 세워진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우리의 사회나 삶도 시대가 바뀌고 발전함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인기 있던 직업도 어느 순간에 없어지기도 하고 또 생각지도 않았던 일자리가 생겨난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필수 직업이었던 전화교환원과 버스 안내양을 비롯하여 산업화 시대의 수출 일꾼이었던 미싱공 같은 직업은 거의 사라졌다. 반면에 빅데이터 전문가, 드론 조종사, 애완동물 장의사, 유품정리사와 같은 직업은 새로 생겨났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나 청춘일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일선에서 밀려나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꼰대 노릇하며 잔소리하던 선배들을 보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처지가 되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거나 즉석음식점에서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주문 기기 앞에 서서 여러 번 눌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뒤에서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눈치가 보인다.


성능 좋은 최신 핸드폰을 사도 전화 통화와 문자를 보내고 사진 촬영하는 것 이외에는 대부분 무용지물이다. 새로운 기능을 익히려고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것도 모르느냐'며 눈치를 주며 가르쳐 주지만 그때뿐이다. 마음이 편치 않다. 속으로 '너희들도 나이 들면 우리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어렵다고 피하거나 게을리 하면 뒤처지기에 십상이다. 주민센터에 가면 스마트 기기 다루는 법을 비롯하여 유튜브,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IT 기술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목계나루가 한창 번창할 때는 어느 누가 지금처럼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시간 앞에는 장사 없다'라는 말처럼 세월이 흐르다 보니 바뀐 것이다. 은퇴하고 뒤로 물러났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요즈음에는 워낙 급변하는 시대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지만, 100세 시대를 맞아 건강을 챙기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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