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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0>] 막걸리와의 전투


입력 2022.06.03 14:02 수정 2022.06.03 10:03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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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막걸리와의 전투


웅장하면서도 운치 가득한 문화예술회관을 배경으로 역사의 물길 강주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원년 시월에 김시민 목사의 삼천팔백 관군이 이만의 일본군을 물리친 승리의 역사, 이듬해 계사년 유월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6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며 관기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투신했던 비운의 역사 모두를 깊은 강물에 담그고 강주남강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를 관통하는 평화로운 남강 둔치엔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쐬러 나와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파워 워킹으로 힘차게 걷거나 택견처럼 설렁설렁 걷는 사람들, 벤치 또는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깔판 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김석규는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성큼성큼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임봉식도 보해를 데리고 뒤따라와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김석규가 과자 한 봉지를 집어 보해에게 건네주고 천천히 막걸리 통 뚜껑을 열었다. 바야흐로 전운이 감도는, 목에서 군침이 도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종이컵에 막걸리를 가득 장전시키고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은 꿀꺽, 비명소리를 지르며 기분 좋게 산화했다. 이번엔 임봉식이 막걸리를 장전할 차례였다. 두 사람은 ‘걸터앉아 쏴!’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은 노리쇠 같은 목젖이 격발되자 다시 꿀꺽, 소리를 지르고 스러졌다.


“요즘 계속 집에만 있냐.”


막걸리 일개 소대를 섬멸하고 다음 소대를 불러들이며 김석규가 물었다. 물론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백수가 있을 곳이 집밖에 더 있겠는가. 다만 대화의 연결고리나 맥락상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고도의 장치와도 같은 질문이었다. 임봉식이 모래 장난질을 하는 보해를 지켜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억거렸다.


“과외 같은 것도 않고?”


임봉식이 사천에 거주할 당시 중학생 아들의 과외를 직접 맡았던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과외선생을 붙일 형편이 못되었던 이유도 이유였지만 그것보단 임봉식이 하릴없이 집에만 있다 보니 느는 게 잠이요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임봉식의 과외 실력이 아들의 성적향상으로 증명되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들 친구들의 엄마들이 과외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봉식은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는데 사실상의 이유는 같은 아파트 아줌마들에게 백수처럼 보이는 것이 쪽 팔렸기 때문이었다.


“바빠. 애 봐야 하고 집 치워야 하고. 시간 나면 컴퓨터 게임해야 하고.”


또 하나의 적군을 죽이며 임봉식이 정말로 바쁜 듯이 대꾸했다. 김석규는 진짜 바빠서라기보다 안 바쁘면 쪽 팔리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면서 막걸리와의 전승에 고무되어 평소 생각해둔 화제 하나를 툭 던져보았다.


“어디 서당 같은 걸 하나 하지 그래. 내가 전에부터 고민했던 문젠데 우리나라 초중등 교육은 학교에서 할 게 아니라 서당에서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사실 조선말에 설치된 소학교는 신분차별이 없는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거였지만 일제 때 그 명칭이 보통학교, 국민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뒤틀리고 왜곡되어 버렸지. 국민학교가 뭐냐.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거 아니냐. 일제 잔재 청산한다고 해방 50년이 지나서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긴 했지만 진짜 청산하려 했으면 국민학교를 없애버렸어야 해. 이름 바꾼다고 그 본질이 어디 가냐? 일본 놈들 못된 버릇 이지메가 우리나라에 수입돼서는 왕따가 되고 독재 때는 애들 국민교육헌장 외우라면서 일제 못지않은 세뇌교육에 열을 올리고. 아,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냐. 하지만 돼지우리도 아니고 닭장도 아니고 애들을 그렇게 공장 교육 시킬 건 없지 않겠어? 차라리 서당 같은 소그룹으로 전인교육을 도모하는 게 그나마 낫지.”


“그럼 좋지. 나 같은 백수가 동네 애들 가르치면서 보람도 찾고 말이야. 하지만 학교를 서당으로 돌리기에는 이미 교육도 산업이 되어버려서 안 돼. 기득권 쥐고 있는 자들이 돈벌이 내놓으려고 하겠어? 그리고 요즘은 우리 때처럼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 아니라서 학교 교육도 받아 볼만 해. 우리 때는 한 반에 육십 명씩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이삼십 명만 있으니까.”


막걸리의 화력은 드세진 않으나 은근한 구석이 있었다. 저항이 만만찮았다. 그 동안 쌓인 회포를 살랑살랑 부는 강바람에 날리며 막걸리 2개 소대를 섬멸했는데도 김석규는 후련하지 않고 오히려 아쉬움만 더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전투를 연장하고 싶은 충동이 분수처럼 샘솟고 있었다.


김석규는 전쟁광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적을 격퇴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투는 김석규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가정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산전수전으로 잔뼈가 굵은 몸은 휴전이나 정전, 또는 퇴각일랑 군인의 본분이 아니라며 본능적으로 마다하고 있었다.


“집사람이 지금 퇴근한다는데.”


불현듯 걸려온 전화에 임봉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쯤에서 집에 가주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 난 어떡하고? 김석규가 임전무식(臨戰無識)에 임전무퇴의 기세로 질문했다. 즉, 전투에선 유식한 놈보다 무식한 놈이 장땡이라는 우둔함과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을 친 결연함이 적당히 버무려진 그런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자신을 수행하거나 인도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자 임봉식이 그 기세에 눌렸는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어쨌든 안색을 부드럽게 풀어헤치며 물었다. 주꾸미 어떠냐?


“나야 뭐.”


김석규가 슬쩍 얼버무렸지만 그건 주꾸미를 상대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폭탄주까지 투하된 어제의 야간전투, 그리고 상황버섯주와 벌였던 대낮의 교전, 이어진 막걸리와의 전투로 김석규는 영화 플래툰에서의 피도 눈물도 없는 반즈 중사처럼 전쟁광이 되어 이 적이냐 저 적이냐 따지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쟁터에만 보내준다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전의에 불타는 임전무식꾼이 되어 있었다.


임봉식이 교전 장소로 금산주꾸미라는 옥호를 거론했다. 이제껏 섭렵한 주꾸미 식당 중에서 제일 잘 하는 곳이라 아내와 자주 간다는 것이었다. 마침 위치도 김석규의 아파트 근처니까 전투 중 후송하기도 쉬울뿐더러 교전 후 이동하기도 쉽다고 그 사유를 밝혔다.


“위치가 마음에 걸리는데….”


조금 전의 충천하던 전투의지는 어디로 갔는지 김석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불현듯 아내 박미옥의 도끼눈 레이저가 김석규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났기 때문이었다. 교전 장소가 집에서 가까운 만큼 도끼눈 레이저에 피폭될 가능성 또한 현저하게 높았다. 김석규는 이틀 동안의 전투를 치르느라 얼굴색이 빨간 고무대야처럼 변해 있었다. 만약 박미옥에게 그 모습을 들킨다면 무사하리란 보장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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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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