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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4>] 사건현장


입력 2022.05.13 14:15 수정 2022.05.16 09:52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

제4화 사건 현장


신예지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지구대 장의자에 앉아있었다. 맨발에 스타킹이 찢어지고 시뻘건 피가 밴 발가락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신예지는 엄청난 충격의 여파로 말하는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꺽꺽, 딸꾹질 섞인 울음소리만 낼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신예지에게서 진술을 받거나 현장에 동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형사2계는 지구대 순찰차를 타고 신예지의 집에 도착했다. 폴리스라인을 친 단독주택 입구에서 의경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고,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실내엔 이미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들어와 현장 감식에 한창이었다.


거실 중앙에 60대 남성이 상당히 많은 피를 쏟고 엎드린 채 죽어있었다. 시신을 슬쩍 들어보니 가슴과 복부에 흉기로 찔린 자상이 얼핏 보아도 대여섯 군데나 확인되었다. 탁자 위엔 재떨이에서 쏟아진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고, 먹다 남긴 양주병이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바닥엔 피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탁자와 소파에까지 혈흔이 낭자했다.


안방은 출입한 흔적 없이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으나 벽과 천정이 비산 혈흔으로 도배된 작은방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방문 앞에 쓰러져 있는 50대 여성은 외출복 차림이었고 침대 위의 20대 남성은 츄리닝 바람이었다. 여성은 목 앞부분이 날카로운 흉기로 절개되어 있었고 남성은 자다가 변을 당한 듯 반듯이 누운 자세로 왼쪽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온 피로 침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원피스에 하이힐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예지가 늦은 밤 주택가 도로를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었다. 버스를 탈 때만 해도 비가 추적거렸는데 언제 그쳤는지 버스에서 내릴 때엔 우산을 펼 필요가 없었다. 기온이 초겨울처럼 쌀쌀했지만 새로 입사한 회사의 환영 만찬자리에서 제법 술을 마셔서 그런지 찬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도로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었으나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려 발을 헛디딜 염려는 없어 보였다.


변동원의 여성 편력과 폭력에 회사를 그만둔 후 신예지는 부모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하나뿐인 오빠라는 인간이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며 대학을 졸업하더니 여전히 빈둥빈둥 놀면서 속을 썩이고 있는데 자신까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젊어서부터 한시도 쉬지 못하고 공장일과 허드렛일을 나가는 가련한 처지였다. 신예지는 집을 나서긴 했으나 딱히 갈만한 데가 없어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변동원의 전화는 하루에도 수십 번 걸려왔지만 신예지는 아예 수신거부를 설정해두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책을 넘기며 시간을 보낼 때 신예지는 신문의 구인구직란을 꼼꼼히 넘겨보았다. 그리고 전화로 열성을 다해 구직하고 면접관에게 자신의 장점을 열심히 피력한 덕분에 신예지는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었다. 강철을 가공해서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작은 회사의 경리직이었다. 신예지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에 환영 만찬자리에서 주는 술을 마다않고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부서장과 직원들이 신예지더러 화끈한 신입이라며 추어주었다.


적당히 술에 취해 걷다보니 으슥한 밤길도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신예지가 주택가 도로에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어두컴컴한 외진 곳에서 불현듯 검은 물체가 튀어 올라 쏜살같이 반대편 골목으로 달아났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적이던 동네 도둑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난 모양이었다. 도둑고양이보다 더 놀란 신예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술기운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집에 도착한 신예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접이우산으로 대문을 밀어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아주 쉽게 철제대문이 열렸다. 평소 문단속이 철저한 어머니의 행동으로 봐서는 의외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 앞에 선 순간 신예지는 머리끝이 쭈뼛 서고 팔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싶을 만큼 집안이 무척 조용했다. 얼핏 이질적이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 놓인 양주병과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자는 건지 어쩐지 고개를 천정으로 올린 채 앉아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한 달 넘게 전화를 해오고 있는 변동원이었다. 하지만 신예지는 눈앞에 천연덕스럽게 널브러진 변동원을 보고도 마치 꿈을 꾸듯 비현실적으로 여겨져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다만 고막을 세게 얻어맞은 듯 쇠북소리가 뇌리 깊은 곳에서 계속 울려나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느낌과 뇌리를 자극하는 쇠북소리는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혈흔을 볼 때도 계속 이어지다가 작업복 차림의 남성이 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뚝 끊어졌다. 남성은 바로 신예지의 아버지였다.


꺅!


신예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 퍼지자 변동원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오른손을 치켜들고 신예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변동원의 손에는 섬뜩하게도 피 묻은 칼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신예지에게 달려들던 변동원이 다행스럽게 탁자에 걸려 넘어졌고, 그 바람에 탁자 위의 양주병과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꽁초가 바닥에 쏟아졌다. 신예지는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도로를 내달렸다.


변동원은 어이없게도 탁자에 걸려 넘어지면서 시신 위에 털썩 엎어졌다. 신예지를 본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기제 삼아 용수철처럼 몸을 퉁겨 올렸지만 취기에 깜빡 든 잠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등산화를 신은 두 다리가 제대로 워밍업 되지 않아 그만 탁자를 뛰어넘지 못하고 정강이인지 무릎인지 어디쯤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변동원은 정강이인지 무릎인지 어디쯤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도 잊은 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닥에 흥건한 선혈을 짚고 일어서다 슬랩스틱 코미디언처럼 미끄러져 강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변동원은 허둥지둥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나 구석에 떨어진 칼을 챙겨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신예지는 마치 미친 여자처럼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골목길을 뛰어가고 있었다. 도로에 고인 빗물이 신예지가 내딛는 맨발에 첨벙이며 사방으로 튀었다. 수많은 물방울들이 가로등 불빛에 영롱하게 반짝이면서 한 편의 잘 찍은 CF를 연상케 했다. 신예지가 죽을힘을 다해 내지르는 비명소리만 소거해 버린다면, 비 내린 밤거리에서 맨발의 원피스 여인이 변주해 내는 한 편의 퍼포먼스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장관이었다.


변동원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큰길가로 나가버린 신예지를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었다. 신예지가 달려가는 속도도 속도였지만 행인들의 이목이 하나 둘 쏠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계속 뒤쫓아 가다간 낭패를 당할 것 같아 변동원은 사건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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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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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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