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52)] 청산리대첩 日사상자 146명 vs 3300여명…왜?


입력 2021.10.26 14:00 수정 2021.10.26 13:33        데스크 (desk@dailian.co.kr)

1920년 10월 중국 동북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첩을 거둘 수 있었다. 바로 ‘청산리 대첩’이다.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전과는 한일 역사 갈등의 주요 논쟁거리 중에 하나였다. 2006년에는 이와 관련하여 대중 사이에서 한일 간의 역사 논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청산리 대첩(민족기록화)_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사회ⓒ우리역사넷 청산리 대첩(민족기록화)_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사회ⓒ우리역사넷

한국 측에서는 일본군 사상자 규모를 근거로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이 대패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한국사 교과서 등에서는 청산리 대첩 당시 일본군 사상자가 3000여명이며, 결정적으로 독립군의 포위섬멸전을 통해 일본군 기병연대장이 포함된 연대 규모를 전멸시켰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전사했다고 알려진 기병연대장이 이후에도 활동한 것이 확인되면서 우리의 청산리 대첩 주장이 마치 허구인 것처럼 매도당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시 보고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정과 관련하여 확인할 수 있는 첫 보고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안정근의 ‘파견원보고’이다. 안정근은 임정 파견원으로 북간도에 있었다. 안정근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독립군과 충돌했으며, 1000여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보고했다.


다음으로는 서일의 보고가 있다. 북로군정서 총재였던 서일은 전투에 직접 참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투 직후에 참가자를 규합했다. 이 과정에서 서일은 전투 상황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서일은 이를 토대로 임정에 ‘전투보고’(1920.11.12.), ‘군정서격고문’(1921.2.25.), ‘대한군정서보고’(1921.2.25.) 등을 전달하였다.


서일의 보고에서 전과는 1100~1200여명이다. 다만, 서일의 보고에는 시기별로 일부 차이가 있다. 주된 차이는 ‘자상격살자’ 즉, 일본군 간의 오인사격에 의한 사상자를 포함하는지 여부에 있었다. ‘전투보고’에서는 이를 포함하여 1100여명이라고 보고한 반면, ‘대한군정서보고’에서는 이를 제외하고 1257명이라고 하였다. 일본군 간의 오인사격에 의한 사상자 500여명을 포함하면 1800여명이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우리 사령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군 사상자는 1600여명이며, 중국 관청 조사에 따르면 1300여명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 영사관 비밀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900여 명이라고 하였다. 청산리 대첩을 언급한 서양 신문들도 사상자를 2000여명이라고 소개했다. 중국 ‘요동일일신보’에서도 일본군 사상자를 2000여명이라고 하였다. 결정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철기 이범석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3300여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다.


청산리 대첩의 전과를 언급한 또 하나의 인물인 김경천은 그의 일기에서 여러 소식을 토대로 일본군 사상자가 1200여명이라고 기술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경천이 청산리 대첩 당시 독립군의 전과를 일본군 ‘혼성연대’라고 한 반면, ‘독립신문’ 등에서 사상자 규모를 언급할 때는 일본군 ‘(보병)연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혼성연대’와 ‘보병연대’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병력 숫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혼성연대는 1~2개 보병대대에 기병 등 다른 병종이 포함된 작전상 연대 수준으로 보병연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반면 일본군 보병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어 병력은 2800여명이었다. 혼성연대와 보병연대는 병력 규모상 2배 이상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후 청산리 대첩의 일본군 사상자에 대해 중국 신문 등에서는 연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이범석의 ‘우등불’이 이를 뒷받침하면서 사상자 숫자는 3000여명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당시 전투에 참전하고, 임정에서 전투 상황을 증언하였던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 따르면 확인할 수 있었던 전과는 146명이라고 한다. 그 외 일본군 간의 자상격살자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전과에 포함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서일의 보고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참전자의 전과를 종합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실제 일본군 한 명을 여러 명이 명중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전과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등에서는 일본군의 사상자를 1200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일본군 사상자 숫자가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이 일본군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하는 등 대륙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중국 동북지역 한인 사회와 이를 기반으로 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것은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역에 파병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독립군에 대해 일본군의 ‘인후부’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인정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칫 숫자에 매몰되어 정작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청산리 대첩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 계속 뿌리내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군의 존재 자체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독립군의 존재는 끊임없이 일본을 괴롭혔고, 소모전으로 이끌었다. 이후 전쟁에서 일본이 장기전이 아닌 단기결전을 모색한 것 역시 배후에 독립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 [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가 이번 칼럼을 마지막으로 잠시 휴식기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를 사랑해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곧 더 좋은 칼럼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