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개헌도 하고 한명숙 재심도 하고?
강화된 완력을 주체 못하는 정권
노무현 정권의 좌절에서 배워야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였던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이 평왕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복수를 맹세하며 오나라로 도망갔다. 그는 거기서 공자 광의 책사로 활약했다. 한 때 은퇴생활도 했으나 광이 오 왕(합려)으로 즉위하자 행인(行人:외무 대신 급)으로 발탁됐다.
오왕 합려는 거듭 초를 공격하다가 BC506년 마침내 초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고 종묘를 불태웠다. 이 때 이미 평왕은 죽은 후였고, 소왕은 달아나고 없었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300번이나 채찍질을 가했다. 부형의 원수를 그렇게 갚은 것이다. 옛날의 친구였던 신포서가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다.개헌도 하고 한명숙 재심도 하고?“당신의 복수는 너무 지나친 것 같소. 나는 ‘사람이 많으면 한 때 하늘도 이길 수 있지만, 일단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깨뜨릴 수도 있다’고 들었소. 일찍이 평왕을 신하로서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보이니, 어찌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있겠소.”
오자서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나를 대신해서 신포서에게 사과하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천리를 좇을 수 없었소’라고 말해 주게.”
훗날 오자서도 참소를 당해 자결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사기 오자서 열전).
정부 여당이 21대 총선 압승을 계기로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을 운위하더니 민주당 쪽에서는 ‘한명숙 재심’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청와대측은 문 대통령이 다시 개헌안을 발의할 가능성은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개헌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여당의 의석이 개헌선에 근접해 있다. 굳이 문 대통령이 나설 것도 없다. 문 대통령의 개헌 지침은 이미 재작년 3월 발의했던 개헌안에 구현돼 있다. 그것으로도 못미더워 그는 5‧18 기념식에서 “헌법 전문에 ‘5·18민주화운동’을 새기는 것은 5·18을 누구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아마도 더불어민주당은 해가 바뀌기 전에 개헌을 시도할 것이다.강화된 완력을 주체 못하는 정권한 전 총리 재심 이야기도 우연히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뉴스타파가 왜 한 전 총리의 억울함을 부각시키려는 듯한 보도를 했는지는 그것부터 의아하다. 그렇다고 언론보도에 의혹을 제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언론은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니까). 다만 이미 당시 재판 때 제시되어 법적 판단을 받았던 ‘한만호 비망록’이라는 것을 새로 발견된 문건인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보도한 배경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민주당 쪽에서는 재심 이야기가 예사롭게 나오고 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20일 공개회의에서 “법무부·검찰·법원은 명예를 걸고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즉시 착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심은 법률적으로 어렵지만, 사법농단·강압수사 여부를 스스로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 죄를 네가 알 테니 이실직고 대안을 내놓으렸다”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문 대통령이 이미 2015년 8월 20일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서 “우리는 한 전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고 공언했었다. 그건 친문세력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 원내대표가 그런 식으로 교만을 떨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조국 전 법무장관과 그 가족에 대한 재판, 청와대 참모들의 울산시장 선거 불법 개입 의혹, 청와대 참모들의 무더기 기소 등도 정권 측은 조속히 종식시켜야 할 현안으로 인식할 법하다. “고위공직자수사처가 설치되면 봐라, 윤석열 검찰총장을 가만두나”는 식으로 복수를 공언하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노무현 정권의 좌절에서 배워야게다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인 윤미향 정의연(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 문제도 겹쳤다. 이 경우는 민주당이 사서 짐을 지는 경우다. 양정숙 당선자를 부동산 실명제 위반, 세금 탈루 등 의혹으로 제명한 데 이어 윤 당선자까지 제명하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일까? 더욱이 정의연은 반일 운동의 최전선을 지켜온 단체다. 윤 당선인을 내칠 경우 정권 측의 반일 연대에 심각한 타격을 안길 수 있다. 그래서 덥석 끌어안은 것일 텐데 그 부담을 감당하기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과제들만으로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5‧18 진실규명’을 역설했다. ‘4‧3의 완전한 해결’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날 것도 아니다. ‘세월호 진상규명’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 과제다. 이야말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그 때문에 마음이 급해질 것이고, 일손은 점점 더 거칠어지기 쉽다.총선을 통해 강화된 힘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그로 인한 피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아니라 정권 자체의 몫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걸 깨달을 것 같지가 않다.
코로나 이후 경제는 심각하게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그 침체 양상은 오래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미 정부의 역할이 과도하게 팽창돼 있는 상황에서 민간 부문이 급속히 쇠퇴하게 되면 시장경제체제는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른다. 거기에 임기 말 대통령과 정부의 권력과시 욕구가 겹칠 경우 대한민국의 장래는 정말이지 암담해지고 만다.
‘문재인 정권’이 그나마 실수‧실패를 줄이는 길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 것이다. ‘청산’ ‘척결’의 대상을 더 찾지 말고 이제부터는 정리와 마무리에 들어가야 한다. 끝없이 전선을 확대하다가 결국 제풀에 주저앉고만 노무현 정권의 경험에서 배울 일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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