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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오늘뉴스 종합] [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신경영'으로 글로벌 도약 이끈 승부사, 보유 주식 18조 향방…지배구조 변화는? 등

▲[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신경영'으로 글로벌 도약 이끈 승부사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42년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모친인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3남 5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 내외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느라 무척 바빴고 이 회장은 부친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던 이 회장은 여섯 살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녀야 해 잦은 전학으로 또래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는 이런 이 회장을 위해 장난감들을 많이 사줬는데 이 회장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분해·조립하는 취미를 가졌고 이러한 취미는 성인이 돼서까지 이어졌다.
▲[삼성 이건희 별세] 보유 주식 18조 향방…지배구조 변화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하면서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故) 이 회장이 보유중인 약 18조원가량의 삼성 주식을 유족들이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상속세를 지불해야 한다. 삼성물산 불법 합병과 회계부정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까지 진행 중이어서 지배구조 정리 과정은 험로가 예상된다. 이 부회장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4세 경영’ 포기와 ‘새로운 지배구조 개편’을 언급한 만큼 지주회사 체제가 유력한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가 될지 주목된다.
▲[삼성 이건희 별세] “문화적 경쟁력이 곧 국격”…대한민국 품격 높인 故 이건희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이 25일 오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이 회장은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한 이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이 회장은 아버지인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뜻을 이어 받아 문화예술지원사업에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추진한 인물이다. 고인은 46세였던 1987년 12월,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회장 취임식에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으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상장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삼성은 호암의 의지에 따라 설립 초창기부터 문화의 보급 및 저변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다.
▲[삼성 이건희 별세] 평생 정치와 '불가근불가원'…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4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념으로 국익에 힘써왔지만, 평생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를 지켜왔다.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도 고인의 이러한 삶자취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전 회장은 1966년 TBC 동양방송 입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중앙일보 이사까지 지냈다.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정치권력을 자세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 전 회장 스스로도 생전에 우리나라 정치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 대선 결과 따라 우리나라 경제에도 큰 영향"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질서가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경제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은은 25일 발간한 해외경제포커스의 국제경제리뷰 보고서를 통해 다음 달 13일 치러지는 미 대선이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글로벌 이벤트로 인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번 대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확산과 미·중 갈등 심화 등 과거와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치러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다는 해석이다. 보고서는 우선 두 후보 모두 중국을 향한 압박을 지속할 것으로 보이나, 조 바이든 후보는 다자간 연합을 통해 중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금융당국, '사모펀드 특검'에 떨고 있다
융당국이 국정감사에서 불거진 펀드사태의 후폭풍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가 금융권을 넘어 정치권 최대 이슈로 부상하면서 금융당국에 몰아칠 태풍의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이번 국감 이후 사모펀드 사태에 따른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하는 동시에 '정치적 리스크 관리'에도 돌입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이 가장 걱정하는 상황은 특검이 시작돼 압수수색을 당하고 금융감독기관으로서 권위가 추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등 야당은 펀드사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법(특검)을 국회에 제출하고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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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상주’ 이재용 부회장, 내일 재판 불출석 전망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하며,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은 내일(26일) 예정된 ‘국정농단 사건’ 파기 환송심 재판에 출석하지 않을 전망이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26일 오후 이 부회장 등 삼성 측 파기환송심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 1월 17일 공판이 중단된 지 약 9개월만에 다시 열리는 재판이다.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재판부의 편향 재판’ 등을 이유로 2월 법원에 재판부 변경을 신청하며 중단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달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없다며 이를 최종 기각했다.
일반적으로 공판준비기일에는 피고인이 출석할 의무가 없지만, 관련 사건을 맡고 있는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이례적으로 지난 6일 피고인 중 이 부회장에게만 출석하라는 취지의 소환장을 보내며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이에 이 부회장이 법정에 나올 것으로 관측됐으나, 재판을 하루 앞두고 이 회장이 별세하면서 불출석 할 가능성이 크다. 법조계에 따르면 재판부는 공판준비기일을 예정대로 강행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부회장은 상주로서 빈소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26일 열리는 공판준비기일에는 이 부회장을 제외한 삼성 변호인단과 특검이 향후 재판 일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 18호, 19호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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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허창수 전경련 회장 “당신은 영원한 일등”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별세 소식에 “반도체 산업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사업보국을 실천한 기업인이셨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허 회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병상에서 일어나시어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황망히 떠나시니 슬픔과 충격을 주체할 길이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허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전자제품을 가장 많이 구입하고 분해하셨을 정도로 무수한 전자기기를 다루시어 일찍이 반도체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다”며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살 길은 바로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산업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업을 결심하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하지만 불확실성이 크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이기에 그룹차원의 추진이 어렵게 되자, 직접 사재를 털어 작은 반도체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추진했다”며 “우리 민족은 젓가락 문화라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에서 청결을 중요시하기에 반도체 산업에 적합하다며 가능성과 당위성을 설파했다”고 덧붙였다.
허 회장은 이 회장을 두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단력과 리더십을 발휘한 승부사로 기억했다.
그는 “1987년 4메가 D램 개발방식에서 회로를 위로 쌓는 스택으로 할 것인가 밑으로 파는 트렌치로 할 것인가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스택으로 하라고 지시했다”며 “이후 트렌치 방식을 선택한 경쟁사들이 대량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수율 하락을 경험했고 이는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또 이 회장이 개혁가이자 완벽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허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언급하며 “미래를 향한 뚝심 있는 전진은 연구개발, 인재 발굴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며 “기술도 자원도 없는 한반도에 4차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세계 1위의 반도체, 휴대폰, 디스플레이, 2차전지 같은 첨단산업을 일군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불량품이 있으면 생산설비 가동을 전면중단하는 등 품질관리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며 “품질은 직원들의 인격이자 고객존중의 표현이며 세계 일류기업으로 가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품질로 인한 손해는 본인이 감수하겠으니 최우선 순위로 하라며 강한 책임감과 방향성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이 회장이 적극적인 글로벌 행보로 한국의 국격을 높이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20년을 넘게 활동하시며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격을 높이는데 힘을 보태셨다”며 “특히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하여 10차례에 걸쳐 170일 동안 지구 5바퀴가 넘는 21만km를 이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발표되는 순간, 회장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셨다.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민간외교관으로서 헌신하신 회장님의 따뜻한 진심이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허 회장은 “오늘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전쟁의 시대’로, 패자에게 도움의 손길도 보호해줄 이념도 사라졌다는 회장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며 “이제는 영원한 적과 동지도 없으며 나날이 강화되는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는 우리 수출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헤매게 합니다. 위기경영의 선구자이셨던 회장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때”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허 회장은 “회장님께서 걸으셨던 길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초일류기업을 넘어 초일류국가를 향한 쉼없는 여정이었다”며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각고의 노력으로 변신을 통해 얼마든지 새 생명을 얻고 영속할 수 있다는 말씀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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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용인 삼성가 선영에 영면할 듯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장지는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 내 선영이 유력하다.
이건희 회장은 장례절차를 마치는대로 용인 삼성가 선영에서 부친인 이병철 삼성 회장과 모친 박두을 여사 곁에서 영면에 들 예정이다.
삼성측은 현재 장례 일정이나 장례위원회 구성 등 세부적인 절차나 내용 등을 조율중이다.
삼성 관계자는 “장례 일정과 장례위원회 구성 등 구체적인 사항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이 회장이 영면할 삼성 선영은 경기 용인시 포곡읍 가실리 일대로 국내 최대 테마파크인 에버랜드 부지내에 위치해있다.
용인 선영 토지는 8만2069㎡(2만4869평, 2015년 등기 기준) 규모로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취득했다. 이 회장은 별세하기 3년 전인 1984년 10월 토지 소유권을 자녀와 손자들에게 넘겨 주는 공동명의로 변경했다. 현재 이 토지 주인은 이재용 부회장 등 손자(손녀 제외)까지 당시 기준 총 28명이 포함됐다.
선영 인근에는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 삼성인력개발원 등이 있다. 대표적인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알려져있다.
범삼성가는 선영에서 매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을 기리는 추도식을 진행해왔다. 다만 삼성과 CJ의 상속 분쟁이 불거진 7년 전부터는 같은 날 시간을 달리해 그룹별로 추모식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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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평생 정치와 '불가근불가원'…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4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념으로 국익에 힘써왔지만, 평생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를 지켜왔다.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도 고인의 이러한 삶자취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전 회장은 1966년 TBC 동양방송 입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중앙일보 이사까지 지냈다.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정치권력을 자세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이 전 회장 스스로도 생전에 우리나라 정치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은 1995년 중국 방문 도중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에서 "우리나라는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작심 발언'으로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심을 극히 드물게 토로했던 것 외에는 일생 정치와 불가근불가원의 소신을 가지고 일정한 거리를 철저히 지켰다. 이 전 회장은 중앙일보 이사 시절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정치인은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게 아버님(호암 이병철)의 신념"이라며 "기업은 무한하고 정치인은 유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대초 정치의 문민화(文民化)를 전후해 재계 인사들 일부가 정치에 나설 때, 고인에게도 정치를 권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찾아오자 이 전 회장은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에 발을 디딘 경우를 쭉 봤지만, 정치도 기업도 제대로 안되는 것 같다"며 "정치의 불안에 기업이 영향을 받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일화도 전한다.
당시 정당의 창당에 관여하거나 직접 대선에까지 출마했던 동시대 재계 인사들이 얻은 결과를 고려해보면, 이 전 회장의 이러한 입장은 선견지명이자 혜안에 가깝다는 평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이러한 소신은 소싯적부터 형성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동창인 6선 중진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은 고인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보다는 경영을 통해 국익에 기여하는 방안을 고민해왔다고 전했다.
홍사덕 전 부의장은 "(이건희 전 회장은) '다른 게 애국이 아니다. 공장을 많이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이라고 했다"며 "당시(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독특한 사고였다"고 회상했다.
4·19 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 쏟아져나왔듯이, 당시에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면 이미 '엘리트'에 속하는지라 홍 전 부의장을 포함한 주변 또래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그 시절부터 이미 사업보국의 소신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건희 전 회장의 '사업보국'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 소신은 선친 호암 이병철 전 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부 장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호암은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파동'에 연루돼 홍역을 치렀다. 이듬해인 1967년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는 정치권력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인데도, 들통이 나자 정치권력은 쏙 빠져나가고 기업과 기업인만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호암은 정치권력과의 '불가근불가원'을 철저히 당부했다고 한다.
장인 홍진기 전 장관은 1960년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이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군중에 발포를 명령해 경질되자 후임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으로 임명된지 한 달만에 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뭘 할 수도, 해볼 수도 없었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전 정권 청산 차원에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홍 전 장관도 이후 다시는 정·관계에 몸을 담지 않았다.
이건희 전 회장도 "장인은 기업 경영과 정치·법률·행정 등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자상하게 설명해줬다"라며 "나는 (선친과 장인)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라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과의 거리를 지키라는 생각도 함께 전달됐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정치권서 국익 관계된 요청 오면 발벗고 나서'3수' 평창동계올림픽 '1차 과반' 유치에 역할정병국 "몸 불편한데도 전세계를 직접 몇바퀴유치 됐다는 게 발표되자마자 눈물 흘리더라"
이처럼 이 전 회장은 일평생 정치와 철저히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당색(黨色)과 정파를 넘어 국익과 관계된 일로 정치권의 요청이 오면 발벗고 나섰다.
강원도 평창이 200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캐나다 벤쿠버에 밀려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뒤, 이듬해 국제스포츠계의 실력자이던 김운용 IOC 부위원장이 배임수재·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이 전 회장은 이 사건이 다음 동계올림픽 유치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김운용 부위원장이 한국에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으면 IOC 위원으로서의 자격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등 국내 누구보다 발빠르게 이 문제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부위원장이 실제로 IOC 위원 자격을 잃자 2011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를 앞두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건희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평창은 2003년에 이어 2007년 과테말라 IOC 총회에서도 러시아 소치에 밀려 미끄러지면서 동계올림픽 유치 3수에 나선 처지였다. 이번에도 유치에 실패하면 국익 손실도 물론이거니와 국민들의 사기 저하가 심각할 상황이었다.
이건희 전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전세계를 몇 바퀴씩 돌며 여러 IOC 위원들을 1대1로 접촉하며 설득했다. 고인의 분투 덕분에 평창은 2011년 7월 더반 IOC 총회 1차 투표에서 95표 중 63표를 쓸어담으며 유치전을 끝냈다. 3수 끝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이라는 희소식을 고국에 전해온 것이다.
이건희 전 회장은 더반 IOC 총회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유치에 성공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환호했지만, 정작 지난 2018년의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건강 문제로 개·폐막식 참관 등을 일체 하지 못해 유치 과정에서 고인의 혁혁한 공로를 아는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남아공 더반에서 유치 성공의 장면을 이 전 회장과 현장에서 함께 지켜본 5선 중진 정병국 국민의힘 전 의원은 이날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몸이 불편한데도 전세계를 몇 바퀴씩 직접 돌지 않았느냐"라며 "유치가 됐다는 게 발표되자마자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냥 우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다"고 회상했다.
정병국 전 의원은 "그 당시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실질적으로 정말 큰 힘이 됐다"라며 "지금도 몸도 불편한데 유치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명복을 빌고 영면하셨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5월 9일부터 25일까지 17일간 전국의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설문한 결과, 이건희 전 회장은 이순신 장군(1위)·세종대왕(2위) 등에 이어 14위에 랭크됐다.
당시 생존한 인물로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9위)·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연구소장(13위)에 이어 세 번째였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15위)이나 문재인 대통령(16위)보다 높은 순위였다.
별세한 이 전 회장에 대한 이같은 국민의 평가는 기업인으로서 철저히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국익에 관계된 일이라면 '사업보국'의 신념으로 발벗고 나섰던 고인의 행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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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빈소준비로 ‘북적’...조문은 내일부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한 가운데 빈소가 마련되는 삼성서울병원은 장례식 준비로 분주한 분위기다. 삼성 관계자들은 장례식장에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채 빈소 준비에 한창이다.
25일 오후2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삼성 관계자들이 빈소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70~80명여명의 취재진이 몰리며 혼잡한 상황이다.
취재진들은 장례식장 1층 입구에 포토라인을 설치하고 장례식 준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병원 정문 입구에는 간헐적으로 방송사 차량 진출입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아직 빈소가 마련되지 않아 조문객은 없는 상황이다. 아닐 중으로 빈소가 마련되도 조문은 다음날부터 가능할 전망이다. 삼성 사장단은 26일 오전 10시경 조문을 할 예정이다.
특히 삼성측이 이번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르고 조문을 사양하면서 실제 조문객이 얼마나 올지는 미지수다. 조문과 함께 조화도 사절했지만 조화를 실은 차량들이 간헐적으로 눈에 띄었다.
삼성은 이날 오전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알리면서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니 조화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함을 양해바랍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빈소는 장례식장 지하 2층 17·18·19호에 마련된다.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며 28일 발인 예정이 유력하다. 다만 장례 일정이나 장례위원회 구성 등 세부적인 절차나 내용 등은 아직 조율중이다.
현장에서 만난 삼성 관계자도 “장례 일정과 장례위원회 구성 등 구체적인 사항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이 회장은 이날 새벽 3시59분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그는 2014년 5월 10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삼성서울병원으로 입원 후 6년5개월간 투병 끝에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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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건희 별세] 10년 전 뿌린 바이오 씨앗… 삼성바이오로직스 '결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10년 전 삼성이 5대 신수종 사업으로 꼽았던 '바이오' 사업은 고인의 바람대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2010년 삼성은 바이오시밀러를 중심으로 2020년 누적투자 2조1000억원, 매출 1조8000억원, 고용규모 710명이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조기 사업화가 가능한 분야부터 먼저 키운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글로벌 제약사와 기술 수준 격차가 큰 만큼 오랜 시간과 위험부담이 큰 신약 개발보다는 의약품 위탁 생산(CMO) 사업과 바이오시밀러부터 키운다는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실제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매출은 7015억원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1%, 영업이익도 917억원으로 65% 늘었다.
올 3분기에는 누적매출이 7895억원으로, 영업이익은 2002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체 매출 7016억원과 영업이익 917억원을 초과 달성한 것이다.
3분기 실적은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공장의 매출 증가가 이끌었다. 1~3공장의 고른 매출 증가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49%(898억원) 증가한 274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139%(329억원) 증가한 565억원이다.
바이오 사업은 이건희 회장의 5대 신수종 사업이자,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4대 미래 성장 사업이기도 하다. 2018년 8월 이 부회장은 2020년까지 추가로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한국시간으로 오는 2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탁개발(CDO) R&D 센터를 열고 글로벌 시장 진출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곳을 글로벌 CDO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게 된다.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보스턴과 같은 미국 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그리고 유럽 등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할 방침이다.
세포주(대량 증식해 원하는 항체의약품을 만들어주는 세포)와 생산공정 개발 등을 대행하는 CDO 사업은 다국적제약사 등 고객사와 한번 계약을 맺으면 CMO 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성장 잠재력이 높은 사업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고객사가 주로 미국과 유럽의 제약·바이오 기업인 것도 현지에 CDO R&D 센터를 마련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지 CDO R&D 센터를 통해 프로젝트 수주를 활성화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까지 누적 60개의 CDO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재계

[삼성 이건희 별세] 보유 주식 18조 향방…지배구조 변화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하면서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故) 이 회장이 보유중인 약 18조원가량의 삼성 주식을 유족들이 물려받으려면 막대한 상속세를 지불해야 한다.
삼성물산 불법 합병과 회계부정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까지 진행 중이어서 지배구조 정리 과정은 험로가 예상된다.
이 부회장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4세 경영’ 포기와 ‘새로운 지배구조 개편’을 언급한 만큼 지주회사 체제가 유력한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가 될지 주목된다.
고인이 된 이 회장은 삼성전자 2억4927만3200주(지분율 4.18%), 삼성전자 우선주 61만9900주(0.08%), 삼성SDS 9701주(0.01%), 삼성물산 542만5733주(2.86%), 삼성생명 4151만9180주(20.76%) 등을 보유하고 있다.
고 이 회장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 주식만 삼성 총수 일가에 상속될 경우 증여·상속세 부담이 1조원을 넘어선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인 삼성생명 등과 특수관계인이어서 경영권 할증률 20%가 부과될 가능성도 있다.
고 이 회장은 삼성생명 최대 주주다. 이 회장의 삼성생명 보유 지분 20.76% 가운데 일정 부분을 이 부회장과 삼성물산이 흡수해야 현재의 지배구조 연결 고리를 강화할 수 있다. 상반기 기준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율은 0.06%에 불과하다.
삼성 오너 일가는 이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17.48%와 가족들이 보유한 14.12%를 합쳐 삼성물산의 경영권을 갖고 있다. 현재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 경영권은 이재용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진다.
지주회사 체제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는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한 사업지주 회사와 삼성생명을 한 축으로 한 금융지주로 나누는 것이다. 현행법상 금융사의 비금융 계열사 보유 지분 한도를 10%로 정하고 있다.
변수는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삼성전자 주식 보유분을 시가로 평가하고 총자산 3% 초과분은 법정 기한 내에 처분해야 한다.
보험사의 계열사 주식가치 반영 방식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장가로 변경해 자산 리스크를 줄이자는 취지지만 대상이 되는 기업이 삼성그룹뿐이어서 이른바 ‘삼성생명법’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되면 이들 회사가 처분해야 하는 삼성전자 지분만 20조원(약 4억주) 이상이다. 이 경우 외국계 금융사들의 삼성전자 경영권 공격 가능성, 매각차익의 22%에 달하는 법인세 등이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누구인가…'신경영'으로 글로벌 도약 이끈 승부사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42년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모친인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3남 5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 내외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느라 무척 바빴고 이 회장은 부친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던 이 회장은 여섯 살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며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녀야 해 잦은 전학으로 또래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는 이런 이 회장을 위해 장난감들을 많이 사줬는데 이 회장은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분해·조립하는 취미를 가졌고 이러한 취미는 성인이 돼서까지 이어졌다.
이 회장은 학창 시절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에 가까웠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반박을 하기가 어려운 수준의 지식과 논리를 쏟아내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깊이 생각한 뒤 쏟아내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학창 시절 때때로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내놓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마친 뒤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고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삼성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그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이 회장의 첫 취임 일성은 '위기'였다. 그의 눈에는 취임 당시 삼성에 팽배해 있는 무사안일주의가 가장 큰 위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세계일류'를 위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강도 높은 주문은 삼성의 DNA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40대 젊은 나이에 그룹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르며 외친 변화의 열망은 삼성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전자와 반도체 사업을 통합하는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또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반도체, 우주항공 등 신사업과 R&D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삼성의 DNA는 변화하기 시작했고 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눈부신 성장가도를 달렸다. 이 회장의 재임 시기에 스마트폰·반도체·TV 등 세계 1위에 오른 제품은 19개로 그룹 전체 매출은 39배로 껑충 뛰었고 순위에도 들지 못했던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는 톱10 반열에 올랐다.
이 회장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물론 성장의 이면에는 아픔도 존재했다. 지난 1995년 전격적으로 뛰어든 자동차 사업은 외환위기 역풍에 4년 만에 법정관리라는 실패를 맛봤고 2007년 드러난 비자금과 경영권 편법승계 논란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좌절도 겪어야 했다. 지난 2013년에는 상속재산을 놓고 맏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등 형제들과 소송을 벌이기면서 재벌 비판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결국 승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와 혁신을 통한 성장 의지는 삼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는 아직도 삼성의 경쟁력으로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위기를 외치며 혁신의 시동을 거는 경영인으로서 삼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막대한 역할을 해냈다.
이 회장은 생애 내내 정직을 생활의 신조로 삼아 정직한 사람을 좋아했고 남을 속이거나 비난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 회장은 과거 세탁기 뚜껑 불량 등에 대해 경영진들이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대응한 것을 두고 강하게 질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무사안일주의와 거짓은 경영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성격 중 두드러진 부분은 조용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강력한 리더십이다. 젊은 시절부터 현재까지 잃지 않는 침묵 속에서 배어나는 강력한 카리스마는 거함 삼성을 흔들림 없이 항진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제 그는 국내 기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영면했지만 그의 리더십은 영원히 후세에도 남게 될 것이다.

재계

[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회장 전과 후의 삼성…매출 40배·시총 300배 이상↑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은 삼성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27년간 삼성은 물론, 한국 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인이 회장으로 취임하던 1987년 당시 삼성그룹 매출은 9조9000억원으로 10조가 채 되지 않았다. 돈의 가치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으로 치면 재계 20위권(효성그룹 2013년 9조674억원)에 가까스로 드는 수준이다.
시가총액은 1조원, 임직원 수는 10만명, 수출은 63억달러였다.
이 정도만으로도 국내 일류 기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삼성의 수장이 된 고 이건희 회장은 ‘세계 일류’라는 더 큰 목표를 내세웠다.
◆ ‘초일류 기업’ 향한 멈추지 않는 도전
1987년 12월 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회장 취임사에서 고 이건희 회장은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는 휴대폰, TV, 반도체 등 주요 제품과 부품 분야에서 세계 일류로 도약했고, 삼성중공업도 세계 1,2위를 다투는 조선업체로까지 성장했다.
10조원에서 시작한 그룹 총매출은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 늘어났다. 매출은 정부 총수입과 대등한 수준이고, 시가총액은 거래소 상장기업 전체의 26% 이상을 차지한다. 인터브랜드가 추산한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달러(한화 약 70조3055억원)로, 처음으로 ‘글로벌 톱5’에 이름을 올렸다. 고 이건희 회장의 공언대로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명실상부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삼성그룹이 성장하기까지 여러 차례의 고비와 전환점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고 이건희 회장은 확고한 방향 설정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고비를 도약의 계기로 만들었다.

◆ ‘반도체’ 미운 오리새끼에서 성장동력으로
2019년 기준 60여개의 삼성 계열사 중 그룹의 성장을 가장 앞장서 이끌어 온 계열사는 삼성전자다. 특히 삼성전자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던 분야는 바로 반도체다. 삼성이 지난 1994년 국내기업 사상 최초로 조단위 이익을 창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반도체였고, 반도체의 성공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창업에 이어 이건희 회장의 제2창업의 성과로 얘기됐다.
고 이건희 회장은 본인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는 부문이 바로 반도체라고 말할 정도로 반도체 사업에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주식회사’와 ‘원자력’, ‘반도체’를 인류의 3대 발명품으로 꼽으며 반도체가 미래 산업 사회 생활 전 분야에 걸쳐 필수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회장 취임 이전부터 경영진의 반대에도 부도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투자를 강화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무너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83년부터 2~3년간 반도체 1, 2라인에 그룹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87년에는 3라인 건설 착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때까지 적자는 계속됐다.
하지만 1988년 반도체 시황은 없어서 못 팔 정도의 대호황 시기에 들어갔고, 삼성은 다음해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고 1조원의 투자비를 회수했다. 이후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으며, 이후에도 세대별로 ‘세계 최초 개발’의 타이틀은 항상 삼성의 것이었다. 삼성의 기술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표준이 됐다. 고 이건희 회장의 대규모 선행투자가 없었다면 이같은 성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창업 2세대가 이룬 성과로 이쯤에서 만족할 법도 하지만 고 이건희 회장은 오히려 더 큰 위기의식을 가졌다.
90년대 초반 고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상태를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기형, 삼성물산은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전자의 병을 합쳐서 둘로 나눈 정도의 병을 앓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92년 미국 LA 현지 매장에서 삼성 제품이 고객으로부터 외면 받아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는 것을 봤다.
그는 다음해 사내방송인 SBC 품질고발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세탁기 조립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이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내고 조립하는 모습이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 나온 게 이 시점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과 함께 1993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해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명과 함께 350시간의 토의를 갖는 이른바 ‘신경영 대장정’에 나섰다.
삼성 신경영의 핵심은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 경영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불량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쓴 세탁기 생산라인은 신경영 선언 뒤 곧바로 라인을 스톱해 불량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해결한 뒤 다시 가동에 들어가는 체제로 전환됐다. 삼성 품질혁신의 기반이 된 ‘라인스톱제’라는 게 이 때부터 도입된 것이다.
이 제도 시행으로 불량률이 30%에서 많게는 50% 줄었다.
이후로도 고 이건희 회장은 중요한 고비마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일깨웠고, 이는 삼성의 지속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지난 2010년 3월 24일 1년 11개월여의 공백 끝에 경영에 복귀한 고 이건희 회장의 복귀 일성은 “지금이 위기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였다.
고인이 생전 공식 석상에서 남긴 마지막 화두도 ‘위기의식’이었다. 지난해 10월 삼성 신경영 선포 20주년 기념 만찬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사후에도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의 위상을 지켜낼 유훈을 남긴 셈이다.

재계

[삼성 이건희 별세] 이건희 회장의 말·말·말…"이대로 가면 모두 망한다"

“이대로 가면 모두 망한다. 변해야 한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쓴 ‘삼성신화’의 중심에는 ‘말(言)의 경영’이 있었다. 이 회장은 생전 조직 구성원들을 향해 폐부를 깊숙이 파고드는 말들을 직구로 던지곤 했다. 이 같은 쓴소리는 자칫 ‘삼류의 늪’에 빠질 뻔했던 삼성을 오히려 일류기업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이 됐고, 더 나아가 세간의 눈길을 끌면서 ‘어록(語錄)’으로 추려져 곳곳에서 회자됐다.
회자되는 이 회장의 혁신적인 발언 대부분은 그가 1993년 2월부터 7월까지 미국 로스엔젤레스(LA)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일본 도쿄·오사카·후쿠오카 등을 돌며 ‘신경영 대장정’을 펼칠 당시 나왔다. 이 행보 이후 삼성은 탄탄대로를 걸어 연간 매출 9조9000억원(1987년 이 회장 취임 기준)에서 230조4000억원(2019년 기준)의 실적을 내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 회장의 여러 말들 중 가장 유명한 발언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였다. 6월 독일에서 열린 임직원 회의 당시 신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던져진 이 메시지는 27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곱씹히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대통령) 후보가 선거 유세 중 변화를 강조하며 이 회장의 이 발언을 인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이 회장은 당시 회의에서 “‘내가 회장 자리에 앉아보자’는 생각을 가지라”면서 “내 자신이 후계자가 된 1979년부터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적 존재라고 말해왔다. 암은 초기에 자르지 않으면 3~5년 내 죽게 만들고, 삼성전자는 자칫 암의 만성기에 돌입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이 현재 세계적 수준의 질적 제품들을 만드는 데 도화선이 됐다.
같은 해 7월 열렸던 일본 오사카 회의에서는 ‘꾸밈없이 소통하는 집단’이 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속았다. 비서실장·사장·팀장들이 모두 날 속였다. 집안에 병균이 들어왔는데도 5년, 10년간 나를 속였다”며 “이대로 가면 모두 망한다. 변해야 한다. 옳은 것,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 일류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이 회장은 구성원 모두가 ‘고진감래(苦盡甘來·고생 끝에 낙이 온다)’를 경험하길 바라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그러나 이를 극복해봐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3월 일본 도쿄와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집단의 이익을 저버리는 이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도 나왔다. 이 회장은 “100명에 1~2명 꼭 뒷다리 잡는 사람들이 나오게 돼있다”며 “의식주 보장해주겠다. 안 내쫓는다. 그러니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 옆으로 돌려놓느냐”고 쏘아붙였다.
신경영 대장정의 처음과 마지막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위기와 극복’이었다. ‘촌철살인 어록’의 시발점이었던 2월 LA회의 당시 이 회장은 LA가전매장 구석에서 삼성 제품이 먼지투성이인 채로 놓인 것을 보고 삼성 경영진을 LA로 불러 “우리의 주력 상품이 가게 한 구석에서 먼지가 앉아 있으면 삼성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6개월 대장정의 종착지였던 7월 일본 후쿠오카 회의에서도 이 회장은 이 같은 주제를 강조했다. 그는 “기본적인 양의 전제 아래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양이 일정 수준에 이르고 질이 확보되면 이익은 당연하다”며 “그러면 국내 1위가 되고, 세계에서 4위, 3위, 2위 드디어 1위가 될 수 있다. 이게 스케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 회장은 “위기는 벌써 와있다. 앞으로 3~5년의 중요성은 과거 50~100년과 마찬가지다”(2월 LA회의),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를 최소 입사 10년 후 해야 한다”, “작은 것부터 행동하라. 나부터, 내 주위부터 바꾸자”(이상 7월 후쿠오카 회의) 등의 말을 남겼다.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한 고 이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고 했다.
2013년 신경영 20주년 기념사에서는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며, 신경영은 더 높은 목표와 이상을 위해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며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창조적 역량을 모으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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