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없는 대한민국

    [데일리안] 입력 2020.07.08 03:00
    수정 2020.07.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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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격’은 그 나라의 품격이 전제되어야…문화적, 도덕적 가치의 통합

공감 위에서 싸우면 형식과 행태가 어떻든 선을 넘을 수 없어

국회의사당이 짙은 안개속에 빠져 있는 모습.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국회의사당이 짙은 안개속에 빠져 있는 모습.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고(故) 최숙현 선수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인생을 마감했다. 명백히 죽음은 있는데 실체는 없고 공방만 난무한다. 선수출신으로 선택돼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은 이를 ‘진영간 정쟁’으로 호도해 문제의 본질을 훼손한다. 선수출신 차관은 허둥대고만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성적지상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정신은 사라지고 메달에만 집착하다보니 로봇 같은 ‘스포츠 쟁이’만 남는다. 이런 시스템에서 그들에게 인권은 없다. 그러니 존중받을 수 없다. 비단 스포츠만의 문제는 아니다. 본질이 잘못됐는데 현상에서만 원인을 찾으니 처방에 실패하고 헛다리만 집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시절 “대한민국 국격(國格)이 높아졌다”란 말을 많이 했다.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 입지가 탄탄해졌다는 자랑이었다. ‘금융위기 극복’은 세계의 모범이 됐고, G20 등 국제행사들도 많이 유치했다. 이런 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유수한 세계정상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우리 국민은 이제야 우리가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상당부분은 거품이었다. 찬찬히 안을 드려다 보면 우리나라 국격은 한계가 있었다. 급성장에는 부작용과 결핍이 있기 마련이다. 벼락치기 시험공부는 기초학력의 부족을 감추고 당사자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허상을 심어준다. ‘한강의 기적’이란 눈부신 경제발전과 IMF외환위기, 2007년 국제금융위기 극복은 국제사회에서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벼락부자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는, ‘허영’과 ‘갑질’만 남는 것도 이런 이치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인권(人權)’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가능하다. 인권은 ‘인격(人格)’을 전제로 한다. 인격은 ‘사람의 품격(品格)’으로 정의된다. 품격은 ‘성품(性品)에 따른 지위(地位)’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의 ‘성품’이 그 ‘인격’을 규정한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성품이 미치지 못하면 인격을 논하기 힘들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격’은 그 나라의 품격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가의 품격은 그 나라가 지향하고 가꾸는 문화적, 도덕적 가치의 통합이다. 단순한 경제력만으로는 국격을 논하기 힘들다.


이명박 정부 출범 때 국민인사가 “부자되세요”였다. 필자는 이명박 후보 대선 선대위에 있으면서도 이 인사가 불편해 입 밖에 내기를 꺼렸다. ‘부자’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세계대표 부국인 북유럽국가들의 국민 중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계최고 부자나라인 미국에서도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국민이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물신주의’는 매우 천박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 나라에서는 허례허식(虛禮虛飾)과 갑질이 만연한다. 부(富)는 소비하고 군림하는 수단으로만 쓰인다. 그런 사회적 풍조가 ‘국격상승’을 허망한 말장난으로 들리게 했다. 부를 기반으로 더 근사한 가치를 지향해야 선진국이다.


‘가치(價値)’는 무엇인가? ‘경제적 가치’는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가치’의 일부일 뿐이다. ‘가치 있는 인생’은 경제적 가치위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더 상위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경제적 가치’는 살기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사회적 가치’는 인간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보다 숭고한 그 무엇이다. ‘사랑’, ‘박애’, ‘신의’, ‘자유’ 등 종교, 이념적 이상이 그런 가치다. 이런 사회적 가치는 그 사회의 ‘정치담론 수준’에 의해 검증된다. 우리사회는 그런 가치가 없다. 먹고 살고, 부를 누리고 휘두르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로 착각한다. 이런 풍조는 ‘위선(僞善)’을 넘어 ‘위악(僞惡)’으로 발전한다. 가식(假飾)은 양반이다. 스스로 악인임을 자랑하며, 그것을 ‘세련되고 힙(hip)한 것’으로 포장한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학창시절, 정치의 정의를 ‘가치에 대한 권위적 배분’이라고 배웠다. 여기서 ‘가치’는 경제적 가치다. 보다 품격 있고 고상한 가치가 아니다. 그러니 정치가 일차원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또 정치의 본질이 ‘분배’라고 한다. 그러니 포퓰리즘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게다가 ‘권위적’이라니... 정치의 가장 말단이 정치의 본질인 것으로 오인된다. 우리가 정치실종을 겪고 있는 근본적 이유다. 정치는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의사결정의 과정’이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추구의 방법을 선택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사결정 과정은 블랙박스’에 맡겨놓은 채 ‘분배가 정치의 전부’인 듯 치부한다.


예를 들어보자 ‘평화’나 ‘행복’은 가치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평화’를 지고지순의 정치적 가치로 올려놓았다. 국민들은 속고 있다. ‘민족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독립’과 ‘자유’라는 가치는 어디다 팽개치고 허상에 집착하는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자기희생적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은 온통 비겁자들만 양산하고 있다. 결국 ‘노예의 길’로 국민을 이끄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때도 ‘행복’을 내세웠다. 행복은 가치를 이룬 결과다. 행복만 추구한다면 환각제가 답이다. 실현 불가능한 눈속임이고 말장난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여야나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행태나 구호의 문제도 아니다. 가치에 대한 총체적 미숙아다. 추구해야 할 가치는 없고 진영결집의 구호만 난무하고, 그게 ‘진짜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똑똑하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진짜가치’와 ‘진짜정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짜를 보지 못했으니 낮은 속임수에 휘둘리는 것이다. 여행자율화 이전에 외국(인)에 대한 환상과 함께 무지와 오해가 넘쳐났던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 정치인들의 막말은 국민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국민들 모두 다른 대안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선진국의 정치인들은 겉보기에는 우리보다 더욱 심하게 싸운다. 말꼬리 잡기, 야유와 냉소도 더 심했으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 그런데 본질적 차이가 있다. 공동체로서의 공통분모에 대한 흔들림 없는 공감이다. 그 공감 위에서 싸우면 형식과 행태가 어떻든 선을 넘을 수 없다. 그 공통분모가 그 사회의 궁극적 ‘가치’다. 더불어 ‘정치인의 자질’에도 많은 차이가 많다. 대화중에 논리가 딸리는 사람이 욕설과 막말을 내뱉는다. 과거에는 주먹이 먼저 나왔으니 그 정도로도 발전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가치와 자질이 부족한 정치는 ‘진흙탕 싸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그 사회를 분열시키고 갈 길을 잃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가 거칠어도 사회공통의 가치로 무장한 자질 있는 정치인의 정쟁은 합심해 선을 이룬다. 공동체에 지향을 제시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한다. 우리정치권은 언제나 ‘가치’가 충만한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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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우석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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