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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1세대를 돌아보다-중] 맨주먹으로 산업기반 다진 개척자들

  • [데일리안] 입력 2020.01.23 06:00
  • 수정 2020.01.22 20:54
  • 조인영 기자 (ciy8100@dailian.co.kr)

창업 1세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국 산업화 기틀 마련

위기와 시련에도 도전정신과 뚝심으로 ‘반전 드라마’ 만들어

(왼쪽부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각사(왼쪽부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각사

"이 나라가 재건되는 데는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1950년대 한국이 다시 일어날 가망성은 없었다. 미국처럼 광물자원이 풍부하거나 중국과 같이 광활한 영토도 없는 나라가 이제와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은 그렇게 불행한 국가로 낙인되는 듯 했다.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빈곤 속에서도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과 산업 역군의 해외 진출 노력이 끊임없이 이뤄졌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국민들의 삶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결국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초고속 성장을 이뤄내며 2020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는 기틀을 다졌다.


반세기만에 이룩한 한국의 반전 드라마는 산업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한국식 산업화'는 1960년 산업 태동기 당시 제조업을 일으켜 내수를 살리고 수출 강국 신화를 만든 창업 1세대와 함께 했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최종건, 신격호 등 모두 고인(故人)이 된 창업 1세대들은 자원도 넓은 국토도 없는 한국 땅에서 오로지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오늘날 세계 굴지의 기업을 만들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 승부사,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1915년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가난이라는 숙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4번의 가출 시도 끝에 쌀가게 직원으로 취직한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근면성을 인정 받아 쌀가게를 인수했다. 이후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으며 건설업에도 진출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세웠다.


승부사 기질은 조선소 건설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정주영은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을 마련하기 위해 1971년 9월 영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추천서를 부탁했다.


한국의 잠재력을 의심하는 롱바톰 회장에게 정주영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줬다. "한국은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의 배짱은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고 당시 허허벌판인 울산 바닷가에 오늘날 세계 1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을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라가 없으면 삼성도 없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한국 전쟁 당시 삼성물산을 설립하며 사업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물자 부족으로 모든 것을 수입하던 때 수입 대체산업으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창업하며 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는 기업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업보국 신념으로 삼성전자를 비롯해 30여개가 넘는 기업을 창업했다.


도전 정신은73세 고령의 나이에도멈추지 않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승부수로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주변에서 "일본도 하기 어려워하는 반도체를 어떻게 개발하고 생산하느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이병철의 집념은 1984년 세계 최초의 256K D램 개발과 시장점유율 1위로 이어졌다. 이후 이병철은 미국, 일본 등 선두주자를 차례로 추월하며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왼쪽부터)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최종현 SK그룹 창업주,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각사(왼쪽부터)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최종현 SK그룹 창업주,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각사
전자·화학 산업을 개척한 선구자, 구인회 LG그룹 회장


구인회는 1931년 당시 25세의 나이로 포목상인 '구인회 상점'을 개설하며 LG그룹의 출발을 알렸다. 그는 값을 깎지 않는 대신 자를 속이지 않는 정직함으로 신용을 얻었다.


1947년 구인회는 행운이라는 뜻의 럭키에 착안해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공장들이 파괴됐지만 그는 화장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 화장품업계 1인자로 올라섰다. 이후 그는 치약, 식기, 비닐장판 등 한국 정서에 맞는 생필품을 만들며 국민생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나라가 발전하면 집마다 라디오 한 대씩은 있게 될 것'이라는 신념은 1958년 금성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의 나의 51세였다. 그는 유럽, 미국, 일본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해외 전자공업을 연구했다. 선진 기술을 마주한 그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국산 라디오를 만들겠다는 열정은 'A-501'호 탄생을 낳았고 1966년 국내 최초로 흑백TV 생산에 성공하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전자기기공업을 개척했다.


혜안과 패기의 미래형 리더십, 최종현 SK그룹 회장


미래 변화를 예상하며 대응 능력을 착실히 키워왔던 최종현은 정유, 통신사업을 이끌며 오늘날 SK그룹이 재계 5위권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는 '구원투수'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며 기업가 정신의 본을 보였다.


그는 평소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잘살게 한다'는 경영관을 강조했다. 1980년 석유파동은 그의 철학을 제대로 증명하는 계기였다.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량을 늘릴 대책으로 당시 사우디 석유상과 친분이 있던 최종현에 도움을 청했다.


최종현은 사우디로 건너가 원유도입량을 하루 15만배럴에서 20만배럴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인수전도 승리했다. 이는1970년대부터 ‘석유에서 섬유까지’ 목표를 세우고 중동 국가·기업인들과 친분을 다져온 그의 혜안과 준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맨손으로 기업 성공 신화 이룬 도전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1921년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신격호는 1941년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 기회를 찾았다. 그는 당시 시판되는 껌을 씹어본 뒤 장점을 집약시킨 껌을 개발했다. 반응이 폭발하자 그는 1948년 현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세웠다.


일본에서 입지를 다진 그는 한·일 수교 이후 한국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1973년과 1979년 차례로 문을 연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센터는 한국경제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매출 가도를 달렸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은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 아래 그는 국내 호텔 브랜드 최초로 해외 진출을 단행하고 롯데월드, 롯데면세점 등 대규모 투자를 실시했다. 숙원사업이던 국내 최고층 빌딩 롯데월드타워 역시 이 같은 맥락으로 탄생했다. 화학과 건설에도 두각을 나타낸 그는 롯데를 자산규모 100조원, 재계 5위권 그룹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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