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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파란나라' 만들자고 석기시대로 리턴


입력 2019.06.07 10:37 수정 2019.06.07 11:43        박영국 기자

정부, 탈원전 집착 결과물 '에너지 소비 절감'…산업 퇴보 우려

지자체, 쏘나타 한 대 분량 배출가스 빌미로 전국 고로 고철 만들 판

정부, 탈원전 집착 결과물 '에너지 소비 절감'…산업 퇴보 우려
지자체, 쏘나타 한 대 분량 배출가스 빌미로 전국 제철소 고철 만들 판


한국 구석기시대 생활상을 재현한 모습. ⓒ공주 석장리박물관 한국 구석기시대 생활상을 재현한 모습. ⓒ공주 석장리박물관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80년대 발매돼 지금까지 널리 불리고 있는 가수 혜은이 씨의 동요풍 노래 ‘파란나라’의 한 구절이다.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며 ‘꿈과 사랑으로만 가득한 세상’을 동경했다. 요즘은 미세먼지 등 환경오염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지라 노래에서 언급된 ‘맑은 강물’과 ‘파란 하늘’에 대한 갈망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요는 동요일 뿐.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파란나라’는 이상일 뿐이다. 이상을 좇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현실적 어려움도 많고, 포기해야 할 것도 많은데, 모든 걸 제쳐두고 파란나라 타령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뜬금없이 30년도 더 된 노래 얘길 꺼내든 것은 요즘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파란나라’에 집착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다. 그것도 우리 생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을 쥔 이들이니 도저히 모른 채 할 수가 없다.

정부는 지난 4일 2040년까지 에너지 수요를 기준수요 전망 대비 18.6% 낮추고 발전(發電) 과정에서의 재생에너지 비중을 최대 35%까지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3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확정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탈원전’을 국가에너지정책의 골간으로 고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공약을 지키려면 원전을 없애야 하는데 환경 문제 때문에 화력발전소를 늘릴 수는 없고,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려면 어림도 없으니 전기 사용량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전기를 아껴 쓰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전 국가적으로 두 자릿수의 에너지 사용량 감축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산업의 퇴보를 선언한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어떤 국가건 산업이 발전할수록(인구의 증감 요인을 제외하더라도) 에너지 소비는 늘어나게 마련이다. 에너지를 이용해 공장을 돌려 제품을 만들고, 사업이 잘 될수록 공장 규모를 키워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업에게 에너지 사용을 줄이라는 건, 성장을 포기하거나 한국을 떠나라는 것과 다름없다.

자동차의 전동화와 가전의 자동화·전기화 추세를 감안하면 교통·가정용 에너지 수요도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 선거철 표심을 의식해 가정용 전기요금을 낮추는 마당에 가정용 전기 소비가 줄어들길 바라는 건 너무 야무진 꿈이고, 결국 에너지 소비 절감 압박은 산업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박영국 데일리안 산업부 차장. 박영국 데일리안 산업부 차장.
지방자치단체들도 ‘대책 없는 파란나라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다. 쏘나타 한 대 분량에 해당하는 배출가스를 빌미로 전국 제철소의 고로들을 전부 고철로 만들 판이다.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는 현대저철 당진제철소와 포스코 광양·포항제철소에 대기환경보전법 위반 혐의로 각각 10일간 조업정지 처분을 내렸거나 예고했다.

1500도의 쇳물을 다루는 고로의 특성상 안전성 확보를 위해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안전밸브를 개방해 잔류가스를 배출했다는 이유로 조업정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철강업계는 안전밸브 개방시 배출되는 가스가 기껏해야 쏘나타 한 대가 하루 8시간 열흘 가량 운행시 배출하는 양에 불과하다면서, 전세계적으로 기술적 대안이 없기 때문에 고로 정비시 안전밸브 개방은 불가피하다고 항변했으나 지자체들의 태도는 완고했다.

열흘 간 조업을 정지할 경우 고로 안에 있던 쇳물이 굳어 고로 본체가 균열될 수 있다. 이걸 다시 가동하려면 6개월 이상 걸린다. 재가동 이후에도 정비를 하려면 또 다시 안전밸브를 개방할 수밖에 없으니 재차 조업 정지를 당할 것이고, 결국 완전히 문을 닫아야 된다고 철강업계는 호소하고 있다.

철강 생산은 오랜 기간 그 나라의 공업 생산력을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돼 왔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선박과 자동차, 가전제품의 주요 원자재도 모두 철강이다.

이런 현실에서 전국의 일관제철소 운영을 중단하는, 대한민국을 ‘철강생산 제로(0)’의 공업 후진국으로 만드는 일이 지자체 환경담당 공무원의 책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깨끗한 공기를 갈망한다. 깨끗한 공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 우리가 오랫동안 누려온 문명의 혜택과 경제적 풍요를 포기할 수는 없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원전과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고 제철소의 고로를 멈추라는 건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는 ‘파란나라’를 위해서라면 그런 삶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걸 모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찌루찌루의 파랭새도 알고 안델센도 알지만 저 무지개 너머에 파란나라는 없다. 동화책이랑 텔레비전에만 존재하는,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어서 생각만 하는 나라’일 뿐이다.

‘우리 손으로 지어요 어린이 손에 주세요’라는 가사에 홀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긴 건 아닌지 심히 불안하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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