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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욱 대변인이 말을 잘못했다 치고, 그들은 뭘 했을까?


입력 2019.06.03 08:58 수정 2019.06.03 09:00        데스크 (desk@dailian.co.kr)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남의 비극 두고 말싸움이라니

말실수는 문 대통령도 했는데…남의 비극 정치에 이용 말기를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남의 비극 두고 말싸움이라니
말실수는 문 대통령도 했는데…남의 비극 정치에 이용 말기를


ⓒ데일리안 ⓒ데일리안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대형 크루즈선에 추돌당하며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유람선은 가라앉았고, 우리 관광객 33명중 현재까지 7명만 구조됐다. 7명은 사망, 19명은 실종상태다. 사망자 유가족들, 실종자 가족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유럽 여행을 간다며 상기된 표정으로 집을 나선 가족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거나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어떻게 이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단 7초 만에 침몰했다. 비가 내리는데다 물살이 거셌다. 비 때문에 대부분 1층 선실 안에 있었을 테고, 그래서 생존자 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이고 아내나 남편이고 부모였다. 웃고 집을 나서던 그 얼굴들을 이승에서는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세상의 어느 형벌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으랴. 어떤 위로의 말도 찾을 수 없어 더 죄송하고 안타깝다. 누구의 마음인들 다르겠는가.

남의 비극 두고 말싸움이라니

그래도 희망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는 아니다. 열아홉 분의 실종자를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제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기원이 오죽 애절하고 간절할까. 시간이 갈수록 생환 가능성은 줄어들지만 그럴수록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더해진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아버지는 48년 전에, 어머니는 16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까지도 가끔 꿈속에서, 출타 후 돌아오시지 않는 아버지를 마음 졸이며 기다린다. 때로는 아버지께서 귀가하셔서 안방에 계신다는데도 무슨 연유인지 모습을 뵐 수 없어 안달하기도 한다. 쉰을 못 채우시고 가신데다, 장례를 모시지 못한 탓이리라고 혼자 생각하곤 한다. 어머니는 우리나이로 여든에 가셨으니 그나마 억울하고 죄송한 마음이 덜한지 꿈속에서 기다리거나 찾아 헤매는 경우가 드물다.

사람 사는 게 어떤 면에서는 이별 준비인 것 같아 가끔 소스라치곤 한다. 이승에서 인연 지어졌던 사람 모두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때론 두려워하며 때론 잊어버린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거부나 항의는 무의미하다. 신(神) 말고는 탓할 대상이 없다. 그렇다고 신을 원망하는 것 또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다. ‘신의 섭리’는 인간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전략) 천지는 온통 피어나는 목숨에 젖었는데 / 한 지엄한 가르심은 가르심대로 있어 / 이제 육신은 들녘으로 / 목 메이는 정은 가슴팍에- / 절통한 비정도 이렇듯 스스로이 이루어지매 / 한 가지에 피는 꽃 지는 꽃이 있듯이 / 그래 삶은 있는가? 흐느낌도 고운 것인가?(후략)”(유치환, 아지랑이)

영원히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갑작스런 죽음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을 생각한다면 위로의 말조차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 그 점에서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의 페이스북 글은 사려 부족이었다. 그는 31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안타깝다. 일반인들이 차가운 강물 속에 빠졌을 때 이른바 골든타임은 기껏해야 3분”이라고 썼다. 실종자 수색이 계속되는 와중에 ‘안타깝다’고 마치 생환 가능성이 없어진 듯 말할 것은 경솔했다.

말실수는 문 대통령도 했는데

그 점을 지적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야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마치 실언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한국당이 연이은 망언과 실언으로 국민께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당의 대변인까지 국민의 마음을 헤집고 나선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런데 민 대변인의 말은 문재인 대통령이 구조대와 대응팀 급파를 지시하면서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 것이었다고 한다. 이미 사건 발생 4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현지상황을 보고 받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라는 말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실종자 수색 및 구조, 사후 대책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 즉시 구조대가 출발한다고 해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하려면 13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이었다. 간다고 해서 그 나라 관계 당국과 협의 없이 바로 구조에 착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 만큼 ‘진정성 없는 립서비스’로 들릴 만도 했다.

민주당은 거기서 그치지도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의 무능한 대처 못지않게 국민께 상처가 된 것은 국민의 비통한 마음과는 한참 동떨어진 정권의 태도였다.” 때는 이 때라고 여겨 ‘세월호’를 끄집어냈을 것이다. 기억되기로 세월호 때의 정권 구성원들도 애통함을 국민과 함께 했다. 그랬음에도 사고 대응의 진지성·신속성과 유족 위로의 진정성을 인식시키는데 실패한 결과가 바로 ‘정권의 붕괴’였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내려진 직후 문재인 당시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가 팽목항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방명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광장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1,000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한국당 민 대변인의 페이스북 글을 민주당이 이해하는 식으로 풀이하자면 그 뜻은 이렇게 되지 않을까?

“너희의 희생으로 촛불광장에 거대한 군중이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됐다. 촛불광장의 외침대로 된 것이다. 너희들 덕분이다. 못 지켜줘 미안하다. 그렇지만 기회를 만들어줘 고맙다.”

민주당의 모모한 인사들은 헝가리 유람선 참사와 관련, 어떤 일을 얼마나 했는지 궁금하다. 사망·실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유족 및 가족들을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들의 슬픔 앞에서 야당 대변인의 말을 꼬투리 잡아 논쟁이나 벌인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다. 이게 집권 여당의 모습이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남의 비극 정치에 이용 말기를

기실 문 대통령의 ‘속도’ 언급은 듣기에 따라 피해자와 그 유족 및 가족들의 고통을 더 헤집는 말로 여겨질 수도 있다. 뻔히 시간이 많이 늦었음을 알면서 서두르면 상황이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들리는 표현을, 실수로든 의도적으로든 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민주, 한국 양당, 그리고 다른 야당들도 이런 논쟁 벌일 시간이 있으면 사후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머리를 맞대야 옳다. 그리고 특히 정부와 여당은 이번 일에서 분명히 확인할 게 있다. 헝가리 다뉴브강 유람선 참사와 전남 진도 인근 맹골수도 연안여객선 참사가 정부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세월호 참사 때처럼 책임을 따진다면 ‘문재인 정부’도 해명이 궁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났으니 정부 탓할 일은 전혀 없다고 하겠는가. 우리 국민이 희생당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데도?

왜 여행사들의 해외여행 상품에서 문제의 소지를 찾아내지 못했느냐, 왜 현지 공관이 야간의 다뉴브강 유람선 관광 위험성을 사전에 파악해 고지하지 않았느냐고 몰아세우면 뭐라고 할 것인가. 물론 억지다. 그러나 일어난 사고를 두고 그 책임을 따져들어 가자면 한도 끝도 없다. 민주당이 세월호 참사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정부 당국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따지고 했는지를 돌아본다면 헝가리 유람선 사고의 책임을 대통령과 정부에 묻는다고 해서 지나치다 하긴 어렵지 않을까?

“상주보다 곡쟁이가 더 서럽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는 초상집 곡소리가 온 마을을 휘감을 정도로 크고 오래갔다. 그것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상주들의 기력은 급속히 떨어진다. 곡소리도 잦아들 수밖에 없다. 그건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운 불효다. 곡쟁이의 효용이 거기에 있다. 곡쟁이로서는 잘 울어야 찾는 사람과 수입이 많아진다. 그러니 상주보다 더 서럽게 우는 재주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남의 비극을 기회 삼아 피해자보다 더 분노하고 슬퍼하는 척하는 퍼포먼스를 벌임으로써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려 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제발 없기를 바란다. 남의 고통과 슬픔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만큼 저질스러운 정치행태는 달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당의 야당에 대한 대통령 ‘심기 경호’용 엄포여서도 곤란하다. 우리 정치가 아직도 그 수준에 있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국가적 비극 아니겠는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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