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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협약 비준, 文정부의 '대책 없는 실험' 시즌2


입력 2019.05.23 11:29 수정 2019.05.23 15:57        박영국 기자

노동규제 철폐 없이 ILO협약 비준 강행

노조에 막대한 권한 부여…노사 힘의 균형 무너져

전 국민 볼모로 국가 기간시설 마비시킬수도

노동규제 철폐 없이 ILO협약 비준 강행
노조에 막대한 권한 부여…노사 힘의 균형 무너져
전 국민 볼모로 국가 기간시설 마비시킬수도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정부 입장을 설명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정부 입장을 설명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이어 경제·사회 전반에 심각한 후폭풍을 불러올 또 다른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이다.

노사간 힘의 균형이 노동계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노동계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면 폐해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경제계의 우려에도 불구, 정부는 지난 2년간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할 때 그랬던 것처럼 부작용에 대한 아무 대책 없이 ILO 핵심 협약 비준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22일 ‘ILO 핵심 협약 비준 관련 정부 입장’을 통해 “미비준 4개 핵심 협약 중 3개 협약에 대해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올해 정기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노사 의견 수렴을 거친다고는 했지만 이미 노동계 요구대로 미비준 협약의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에서 경제계의 의견을 듣는 게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가 비준을 추진하는 ILO 핵심 협약은 결사의 자유와 관련된 제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를 담은 제29호 등 3개 협약이다. 강제노동 금지의 보충적 성격인 제105호는 비준을 유보하기로 했다.

ILO 핵심 협약 비준은 일견 노동법규를 국제 기준에 부합시킨다는 측면에서 당위성이 있다. 경영계도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노동규제가 노사간 힘의 균형을 깰 정도로 노동조합에 지나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조가 파업을 해도 사측은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없고, 사업장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여도 막을 방법이 없다. 부당노동행위시 사측은 형사처벌을 받지만 노조는 법적으로 아무 제재를 받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적인 강성노조 국가로 이름을 떨치게 만든, 한국에만 있는 노동규제다.

이 상태에서 ILO 핵심 협약이 비준될 경우 노동계는 기업을 상대로 마음껏 ‘갑질’을 할 수 있다.

‘결사의 자유’와 관련된 두 협약은 노조를 결성할 자유와 파업과 같은 쟁의행위를 포함한 단체행동권의 ‘제약 없는 행사’를 보장한다.

이 협약이 비준되면 공무원이나 실업자, 해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노조 결성이 가능하다. 해고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되면 노사간 단체교섭 자리에 해고자와 실업자가 참석할 수 있게 된다. 사측은 매년 해고자의 복직 요구에 시달려야 하고 나아가 불법행위자도 쉽게 해고할 수 없게 된다.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노조 전임자 급여가 과도하게 지급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한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 역시 유명무실화될 전망이다. 전임자 급여 지급을 자율화하면 강성 노조가 전임자 급여를 과도하게 요구하더라도 사측이 반대할 근거가 사라진다.

공무원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의 ‘제약 없는 행사’를 보장받으면 전 국민을 볼모로 국토 전체를 마비시키며 무리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다. 현재는 국가 기간시설에 파업이 발생하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위협받지 않도록 필수유지 업무와 긴급조정제도를 운용 중이지만 ILO 핵심 협약이 비준되면 이 제도를 운용할 경우 협약 위반이 된다.

실제 민주노총은 과거 정부를 상대로 ‘국가 기간시설을 마비시키겠다’고 협박한 사례가 있다.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현 폴리텍대학 이사장)은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을 앞두고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정부의 노동탄압이 이어진다면 철도와 항공기를 멈추고 전기 공급을 끊는 제대로 된 총파업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제도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협박’에 그쳤지만 ILO 핵심 협약이 비준되면 실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노조의 쟁의 행위가 사실상 무한대로 보장받으면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같은 전국 단위의 조직이 정치파업을 벌일 길도 열린다.

강제노동 금지 관련 협약이 비준되면 대체복무의 형태인 공익근무요원이나 산업기능요원, 전문 연구요원도 군 복무를 해야 한다. 대체복무도 ‘강제노동’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부작용들에 대한 대비는 전혀 돼 있지 않다. 경제계는 ILO 핵심 협약에 앞서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사업장 점거 금지, 부당 노동행위 형사처벌 폐지 등이 이뤄져야 그나마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호소해 왔지만 정부는 검토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체복무 관련 사안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희망론’을 펼치는 데 그쳤다. 이재갑 장관은 “본인이 원할 경우 현역으로 갈 수 있게 선택권을 주면 협약 위반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ILO는 과거 이집트와 터키가 군대 필요인원을 초과한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한 것에 대해 협약 위반으로 판정했다.

재계에서는 일단 협약이 비준되면 즉시 이행 의무가 생기고, 미이행 시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되는 만큼 정부의 이번 ILO 핵심 협약 비준 추진을 ‘무리수’로 보고 있다.

지난 2년간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막대한 재정 투입을 통한 미봉책으로 일관했던 것처럼 이번 ILO 핵심 협약 비준도 ‘일단 저지르고 보자’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저임금 1만원을 밀어붙일 때도 부작용에 대한 대책 없이 급격히 최저임금을 올리더니 결국 경제 파탄으로 이어지지 않았느냐”면서 “노동정책은 경제·사회 전반에 심각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데 또 다시 대책 없는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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