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해치, 영조를 어색하게 그린 이유


입력 2019.05.02 07:00 수정 2019.05.02 05:04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이슈분석> 현재적 의미 풍부하게 담겼을 때 사극의 울림 더 커져

<하재근의 이슈분석> 현재적 의미 풍부하게 담겼을 때 사극의 울림 더 커져

ⓒSBS 홈페이지 ⓒSBS 홈페이지

SBS ‘해치’가 종영했다. 이 작품은 영조의 청년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 작품의 김이영 작가는 과거 ‘이산’과 ‘동이’를 썼다. ‘이산’은 할아버지 영조와 세손 정조의 이야기를, ‘동이’는 숙빈 최씨가 숙종을 만나 아기 영조(연잉군)을 낳게 되는 이야기다. 아기 영조와 할아버지 영조 사이에 젊은 시절이 비었는데 ‘해치’가 그것을 채웠다.

우리 사극 전체로 봐도 영조의 청년기를 다룬 작품이 드물었다. 영조는 보통 사도세자를 죽이는 비정한 아버지나 세손 정조를 보살피는 자애로운 할아버지 정도로 그려졌다. 그래서 ‘해치’가 젊은 영조를 어떻게 그릴지 관심이 모아졌다.

드라마가 시작된 후 나타난 영조의 모습은 너무나 의외였다. 보통 사극에 많은 상상의 설정이 들어가지만 정치의 큰 틀은 그대로 차용한다.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고 노론에 맞선다든가, 장희빈이 남인과 함께 하는 것 등의 역사적 배경이 그대로 드라마에서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해치’는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 연잉군의 뒷배는 노론이었다. 노론은 연잉군의 형이며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왕을 압박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만들고 대리청정까지 요구할 정도로 연잉군을 뒷받침했다. 연잉군이 즉위해 영조가 된 후에도 노론이 영조 조정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해치’에서 연잉군은 노론의 공격을 받는 처지였다. 연잉군은 노론의 기득권을 혁파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지금까지의 사극과는 달리 실제 역사의 큰 틀을 뒤집은 것이다.

작가가 고심한 결과로 보인다. 영조에게서 노론 색깔을 지우기 위한 ‘세탁’ 작업을 한 것이다. 노론색을 지울 수밖에 없는 것은, 노론과 싸우는 인물만이 지도자형 사극 주인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중에게 서인/노론은 악의 축으로 확고하게 낙인 찍혔다. 그래서 주인공은 언제나 서인/노론의 핍박을 받거나 이들과 맞선다. 서인/노론은 기득권 세력이고 그 반대편에 백성이 있다. 이게 우리 사극 속의 기본 구도이고, 일반 누리꾼들의 상식이다.

이순신, 광해군, 정조, 사도세자, 효명세자 등 조선 중기 이후 모든 사극 속 지도자들이 이런 구도에 맞춰 그려졌다. 영조를 노론의 총아로 그리면 이런 상식에 반하게 된다. 지도자형 주인공은 반드시 기득권 세력에 맞서면서 백성의 편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연잉군을 노론에 맞서는 인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밀풍군을 내세워 실제 역사를 밀풍군의 음모로 각색했다. 노론이 경종을 압박하며 대리청정을 요구한 것을 밀풍군의 소행으로 바꾸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실제 역사의 큰 틀에서 벗어난 이색 사극이 탄생했는데, 작가가 영조의 노론색을 밀풍군을 내세워 세탁해가는 아이디어가 나름 신선했다.

이 작품이 사헌부를 주요 배경으로 한 것도 의미 있는 지점이다. 지금까지 사헌부의 업무 모습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린 사극이 없었다. 작품 속에서 사헌부는 마치 현대 검찰처럼 그려졌다. 세자라도 범죄 혐의가 있다면 즉시 수사하는 식이다. 그런 사헌부가 권력세력과 결탁해 신뢰가 떨어진 것을 연잉군이 개탄하고, 즉위 후 사헌부 개혁에 나선다. 검찰개혁을 원하는 현대의 목소리를 사극에 반영한 것이다.

연잉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백성들이 호패를 쌓아 구명하는 장면은 마치 현대의 촛불집회를 보는 듯했다. 소외된 집단인 남인을 등용하는 설정에선 특정세력의 기득권 독점을 경계하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였다.

이렇게 현대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 ‘해치’의 미덕이었다. 사극은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겼을 때 사극의 울림이 더 커진다. 영정조 시대는 워낙 많은 이야기꺼리가 있고, 그 시점이 조선 역사의 변곡점이기도 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현재적으로 재해석될 것이다. ‘해치’는 그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기자
기사 모아 보기 >
0
0
하재근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