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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각식사는 인권이 아니라 인격의 문제다


입력 2018.11.05 08:34 수정 2018.11.05 08:34        데스크 (desk@dailian.co.kr)

<신성대의 행간이설> 무너지는 대한민국, 왜 올바른 리더가 없는가?

<칼럼> 무너지는 대한민국, 왜 올바른 리더가 없는가?

ⓒKBS 화면 캡처 ⓒKBS 화면 캡처

2017(정유)년 설날, 육군참모총장이 논산 신병훈련소 식당에 들러 훈련병들에게 각을 잡아 식사하는 자세를 설명하는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다. 헌데 과연 그 참모총장인들 각 잡아 식사하는 그 속뜻을 알기나 할까? 아마도 대한민국 국군에서 그걸 설명할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 직각식사가 근자에 몇 차례 오락 프로를 타더니 적폐로 찍혀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게 되었다. 지난 9월 28일 방영된 MBC ‘진짜사나이 300’에 직각식사가 소개되면서 우스꽝스런 소재로 화제가 되었는데, 육군본부 내 인권서포터즈단이 이 직각식사를 ‘악폐습’이라며 폐지를 권고했다 해서 폐지절차에 들어갔다고 한다.

리더는 자세부터 다르다

흔히 사관학교 생도들은 식사 때 상체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숟가락을 수직으로 들어 올린 다음 직각으로 꺾어 입으로 가져가도록 훈련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숟가락질마저 절도가 있어야 군인들의 자세라고들 알고 있지만 기실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렴 숟가락질 절도가 군인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상체를 숙여서 밥이나 국그릇에 입을 갖다 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직각 식사법은 70년 전 미군이 가르쳐준 것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관학교와 군 신병 훈련과정에서 시행되어 왔다. 한국군 창설 당시 미군이 지휘관 양성을 위해 육사생도들에게 가르친 듯한 직각식사. 당시 한국인들 간에 전혀 그 개념이 없었던 소통과 리더십 계발을 위해 장교 간, 그리고 사병 간 상대방 눈보기 훈련 방법으로 식사 시 바로 앞에 있는 사병의 눈을 보게 하기 위해 고개를 바로 세운 상태에서 밥을 떠먹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서구에서 지휘관(장교)은 성숙된 사회적 인격체임이 이미 전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헌데 현대에 이르러 자원입대하는 생도나 사병은 대체로 리더로서의 사회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규율을 서둘러 체화시키기 위해 직각식사 등 절도 있는 자세와 동작을 혹독할 정도로 익히게 했던 것이리라.

물론 그 외양상의 절도 있는 동작의 최종적 목적은 피차의 목숨을 지켜줘야 하는 전투공동체내의 소통과 리더십 배양이다. 이게 되어야 전투력 향상과 전쟁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사(지휘관이든 병졸이든)가 동료는 물론 적의 눈을 자동적으로 주시하지 못하면 어찌 되겠는가? 권투선수가 링 위에 올라 서로 마주보고 인사를 나눌 때 상대방 눈길을 피하게 되면 어찌 되는가? JSA 헌병이 선글라스 끼고(선글라스 뒤에 숨어서) 맨눈의 북한 병사를 봐야하는 군대가 무슨 전투력 운운 하는가?

한국의 신병훈련에 이 직각식사를 도입하면서 중도에(혹은 처음부터)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맹목적으로 동작만 따라하다 보니 기형적이고 형식주의적이고 관료적인 악습의 하나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리라. 게다가 식불언(食不言)이란 반문명적 전통관습까지 보태는 바람에 마치 공장의 로봇들과 같은 비인격적 행태를 연출한 것이다.

기역자 식사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점은 ‘절도’가 아니라 ‘소통’이다. 건너편의 상대와 마주보면서 대화하고 소통하며 식사하라는 본디 목적을 이해 못하고 70년 동안 그 동작만 시키는 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겠다. 이 직각식사로부터 다시 악수나 건배, 차를 마실 때, 회의를 할 때에도 상대방을 주시‧주목해서 동시적으로 소통과 피드백이 이뤄지는 것이다.

결국 남귤북지(南橘北枳)! 오렌지가 태평양을 건너오자 탱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불가피하게 인간존엄성을 무시해가면서 고육지책으로 도입된 서양식 소통 훈련, 리더십 배양 목적의 상대방 눈보기 직각식사가 한국에서는 그저 외향적으로 군인답게 절도 있는, 피차 멋있다 쇼로 변질 된 것이다. 그러면서 군대의 속은 계속 썩어가고 전투능력 체화는 물 건너간 것이리라.

헌데 그 70년 동안 군은 뭘 했는지, 직각식사의 의미도 제대로 몰랐던 모양이다. 그 당시 미군들이 미개한 나라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까 거두절미로 그렇게 가르쳤거나 설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중도에 잊어버린 것이겠다. 아무튼 그동안 군에서는 직각식사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3개로 들었다. 첫째, 올바른 식사자세 숙지. 둘째, 군인정신(복종심) 함양. 셋째, 불편함을 통해 당연히 여겼던 식사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자는 취지에서라고 한다.

올바른 식사자세! 맞는 말이다. 헌데 그게 왜 군인으로서 올바른 자세이고 리더의 자세인지를 왜 제대로 설명 못하는가? 군인정신 함양! 도대체 그게 어떻게 해서 군인정신을 함양하는지 역시 설명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은 차마 구차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이왕 직각식사가 아니라 곡선식사나 왼손식사 등 더 불편한 식사법을 개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이 세 번째 이유만 갖다 부치지 않았어도 국민들은 대충 지레짐작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기드온의 300용사

《성경》의 <사사기> 제7장에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가 나온다. 기드온이 그를 좇아온 3만 여명의 백성들을 모두 모아 골짜기 반대편의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너무 많다며 싸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려보내게 하고, 남은 일만 여명 모두를 강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하였다. 그 가운데 개처럼 엎드려 물을 마신 자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을 가려 모두 돌려보내고 나니 남은 자가 삼백 명뿐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삼백의 용사들에게 한밤중에 습격할 것을 명해 적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숙이지도, 또 무릎을 꿇지도 않고 쪼그려 앉되 허리를 세운 바른 자세로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입에 갖다 대어 핥아먹었다. 시야가 확보되니 물을 마시면서도 눈길은 강 건너편의 적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거다.

바른 자세여야 상대방은 물론 식당(전장) 전체를 조망하고 소통하며 통솔하는 리더십이 길러진다는 말이다. 악수나 건배가 그렇듯, 심지어 민주주의조차 우리는 그동안 뜻도 모르고, 멋도 모르고, 맛도 모른 체 껍데기를 가지고 시늉만 내었던 것이다. 바른 자세는 인격과 짐승격을 구분하는 척도다.

외국 영화를 보면 가끔 오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계곡물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원주민 하인들과 짐꾼들은 엎드려 입을 대고 마시지만 주인공과 서양 신사들은 손으로 물을 떠 마신다. 이 장면에서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다. 입을 대고 마시면 바가지도 필요 없고 옷도 안 버리고 편하지! 그러다보니 한국 영화에서는 주인 하인 할 것 없이 똑같이 엎드려 직접 입을 대고 마신다.

또 운동장에서 놀다가 목이 말라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시는 장면에서도 한국의 어른이나 어린이들은 수도꼭지에 고개를 돌려 입을 갖다 대고 물을 마신다. 바로 이런 사소한 장면 하나가 영화의 품격을 망치는 줄을 감독은 물론 관객들 누구도 알지 못한다. 무심코 지나가는 그 영화 한 장면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을 아직도 미개한 나라로 인식해버린다. 그러니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꽤 잘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에선 아무도 안 사간다. 짝퉁인 것이다.

약수터나 옹달샘 등지에서 물을 마시려고 할 때, 혹시라도 컵이나 바가지 등이 놓여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큼직한 나뭇잎을 따서 우그리면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마저도 없으면 물을 손으로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엎드려서 입을 들이대고 마시는 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니까. 운동장 수도꼭지에서도 입을 대는 대신 두 손으로 받아 마시도록 습관을 들여야 한다.

바른 자세가 바른 인격을 만든다. 옛 선비들이 지켜온 인물평가 기준,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첫 단추는 신(身), 바른 자세이다. 특히 상체는 인격 그 자체이다. 해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글로벌 매너는 없다. 아무리 신분이 높은 사람 앞이라도 다리를 꺾어 자세를 낮출지언정 상체를 굽히는 법은 없다. 오직 신 앞에서만 굽히고 엎드릴 뿐이다. 스스로 바로 서지도 못하면서 사회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서길 바랄 수야 없지 않은가?

매너는 경쟁력이다

누가 학다리가 너무 길다고 하면 그 즉시 잘라주는 한민족이다. 참 편한 발상이다. 어디 다리뿐이랴! 부리도 잘라주고 목도 잘라준다. 이런 단무지 민족이 어찌 세계사의 주류가 될 수 있을까? 직각식사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다. 훌륭한 인격체로 만들어준다는데 그걸 마치 인권억압인 줄 오해한 것이겠다. 주인으로 살아보지 못한 하인 혹은 천민다운 세계관에서 나온 발상의 한계라 하겠다. 식사 중 바른 자세는 군인만의 자세가 아니라 성숙된 인격체로서 갖춰야 할 테이블 매너다.

국군이 70년 동안 멍청한 짓을 해왔단 말인가? 군은 왜 직각식사 폐지를 결정하기 전에 그걸 전해준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는가? 바로 옆에 미군들이 있지 않은가? 그토록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은 왜 직각식사 훈련을 없애지 않는지? 긴 칼 옆에 찬다고 다 훌륭한 장수가 되는 것 아니다. 제발이지 ‘깊은 시름’ 좀 하면서 살자! 문명은 디테일이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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