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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遠(영원) 앞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전편>


입력 2018.08.06 08:17 수정 2018.08.17 06:04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우리의 삶 유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할 수 있다"

ⓒ데일리안 DB ⓒ데일리안 DB

‘트루 디텍티브’란 제목의 미드를 봤다. 재미가 있다 보니 ‘계속 이어보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바람에 연이틀 잠을 자지 못했다. 폭염에 수면부족으로 그야말로 건강까지 해칠 정도였다. 물론 그림도 그리지 못 했고 글도 올리지 못했으니 일종의 여름 휴가였던 셈이다.

제1회의 제목부터가 멋졌다. The Long Bright Dark, 길고 밝은 어둠이란 제목. 밝다는 것인지 어둡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둠이란 것이 원래는 밝다는 것인지, 아무튼 뭔가 생각하도록 푸시(push)해오는 제목이었다.

주인공의 대사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많고 드라마의 전개도 복잡한 편이라 전체 내용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작가가 궁금해졌다. 재미가 있으니 저처럼 재미있게 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위키에 들어가 보니 닉 피졸라토란 사람이었다. 이름부터가 이탈리아 스타일이다.

생년월일을 검색해봐야지. 1975년 10월 18일. 생시가 궁금해서 점성술 사이트에 들어가 봤으나 ‘unknown’이라 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프로필을 알고 있으니 운세 흐름을 점검하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乙卯(을묘)년 丙戌(병술)월 丁酉(정유)일이다. 따라서 입춘 바닥은 1987년 정묘년이 된다. 12세 때가 바닥이었으니 나름 곡절을 거쳐 사연을 지닌 인물임이 분명하다.

10월 늦가을에 태어난 이가 생년에 乙木(을목) 偏印(편인)이 있으니 사색형의 성격이고 월에 丙火(병화)가 있으니 영화나 시각 예술 방면과 인연이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와 인연을 맺은 이유를 말해준다.

위키에 들어가 개인의 스토리를 읽어 봐도 어린 시절 고생 좀 했음을 말해준다. 피졸라토는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계이며 가난한 노동 계층의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루이지애나 주의 시골지역인 레이크 찰스로 이사했다고 하니 성장환경이 충분히 어려웠을 수 있겠다.

드라마의 무대가 바로 루이지애나의 레이크 찰스 지역이다. 무더운 습지대이고 토속 샤머니즘인 부두,voodoo 가 성행하는 지역인 이유를 말해준다. 자신의 어릴 적 체험에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드라마인 셈이다.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시각예술학과에 입학한 뒤 소설가가 되고자 했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교수님이 사망하자 글쓰기를 포기하고 텍사스 오스틴으로 가서 바텐더 일과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 일을 하며 살았다. 간단히 말해서 알바 일로 먹고 살았다는 얘기이니 그로선 일종의 방황기였던 셈이다.

(참고로 테크니컬 라이터란 컴퓨터나 소프트웨어 제품의 사용 설명서나 도움말 등을 작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알면 된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사실 나 호호당도 한 때 테크니컬 라이터 일을 하면서 컴퓨터 관련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었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은 바텐더 일도 하는데 이 역시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무튼 사람의 운명은 입춘 바닥으로부터 18년이 지날 무렵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의 운명은 이 무렵에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닉 피졸라토의 경우 1987년이 바닥이었으니 18년을 더하면 2005년 경이 된다. 이 무렵에 하는 일이야말로 그 사람의 길이 되는데 이에 위키에 실린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니 단편 소설을 썼다고 한다. 2003년에 한 편, 2004년 11월에 또 한 편의 단편 소설을 발표해서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작가의 길을 갈 운명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사람의 길은 입춘으로부터 18년이 경과할 무렵에 결정이 된다. 사람의 운명을 살필 때의 핵심 포인트라 하겠다.)

피졸라토는 그 이후 소설을 쓰면서 대학에서 글쓰기 과목을 맡기도 했다. 이에 서서히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으면서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의 두 편을 맡아서 원고를 썼다. 2011년의 일이었다.

2011년은 1987년으로부터 24년만의 일이니 이른바 먹고 사는 기반이 잡히는 운, 흔히 내가 ‘최초의 財運(재운)’이라 부르는 때였다. 피졸라토 역시 타고난 팔자대로 운명의 공식에 맞춰 살아가는 삶인 것을 확인한다. 이처럼 운명에는 公式(공식)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돈이야 좀 벌었겠지만 피졸라토는 꽤나 실망하게 된다.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에 시즌 2가 시작되기 전 그는 그만 두고 말았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은 큰 프로젝트라서 이른바 새끼작가의 비중은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12년 새로운 드라마의 원고를 쓰게 되었으니 바로 이번에 재밌게 본 ‘트루 디텍티브’였다. 이번엔 전체 원고를 단독으로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 총감독(executive producer), 즉 제작의 全權(전권)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 1월에 첫 방영이 된 드라마는 소위 대박이 났다. 첫 편부터 시청률이 엄청 좋게 나왔다. 이에 피졸라토는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피졸라토는 트루 디텍티브 시즌 2를 맡았었고 또 시즌 3도 계약을 했다고 한다. 또 2016년엔 개봉된 영화 ‘매그니피센트 7’, 이병헌이 출연한 그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다.

드라마 속 두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러스트가 하는 대사 또한 인상이 깊었다. 이에 구글을 통해 대사 원문까지 찾아보는 정성까지 발휘했다.

약간 철학적인 내용이지만 번역해 본다.

“내 생각에 인간의 자의식은 진화에 있어 비극적인 실수였어. 우리 (인간)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며 살고 있어, 자연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뭔가를 창조했어,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창조물이란 생각이 들어.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환영을 가진 탓에 고생하는 거지, 감각적인 경험과 느낌으로 둘러싸인 채 우리 모두 각자 개별적인 존재란 확신을 갖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누구도 아닌 존재인데 말이지.”

I think human consciousness is a tragic misstep in evolution. We became too self-aware. Nature created an aspect of nature separate from itself - we are creatures that should not exist by natural law... We are things that labor under the illusion of having a self, that accretion of sensory experience and feelings, programmed with total assurance that we are each somebody, when in fact everybody's nobody...

주인공 러스트 형사가 하는 이 말은 결국 自我(자아)란 개념, 우리 모두 내가 나이며 나라고 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있다고 여기도록 된 것은 진화의 잘못된 부산물이란 얘기이다.

나 호호당은 어린 시절 運命(운명)이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운명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삶이 有限(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삶의 시간이 길어본 들 셀 수 있는 시간 단위, 길어야 백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어린 마음에도 지긋이 입술을 깨물면서 어떤 각오, 결국은 죽게 되리라는 각오를 해야 했고 삶의 무거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일곱 살 무렵이면 우리들은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의식, 줄여서 자아의식, 영어로는 self-conciousness 혹은 self-awareness 가 생길 나이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가질 필요가 없다. 대충 살아도 게으름을 피우며 지내도 때가 되면 절로 부유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엄청 피곤하게 살 때도 있을 것이니 굳이 다짐을 하면서까지 살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공부 잘 할 필요가 없다.

저 이 다음에 부자로 살까요? 행복할 까요? 하고 궁금해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영원한 삶이라면.

그리고 모든 게임은 끝 즉 엔딩 라인이 있으니까 긴박해지고 재미도 생긴다는 것을 나 호호당은 이미 열 살 무렵에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인가 아무튼 그 무렵 쯤에 사주 보는 곳을 다녀오시더니 “야, 넌 다음에 아주 잘 산다고 하더라”,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나를 몹시도 유혹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를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의 사람이다. 그 바람에 결국 오늘날 운명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있어 운명이란 존재는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아니다. 물론 아직도 더 알아볼 영역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냥 학구적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대략 10년 전부터 삶 또한 영원한 것이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명을 연구해온 이가 영원을 얘기하는 것은 다소 모순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운명은 시간에 관한 얘기이고 영원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이다.

바로 트루 디텍티브의 형사 러스트의 저 대사, 사실은 닉 피졸라토의 생각이겠지만 그 말 속에서 충분히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하고픈 말은 꽤나 남았는데 글이 길어졌다. 여름 휴가 철이다. 바깥으로 나가면 더위에 죽을 판이니 꼼짝 말고 작업실 안에서 사색에 몰두해볼 참이다. 독자도 이 글을 읽으면서 사색에 빠져든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한 번 더 글로 이어가겠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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