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행복한 스웨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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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편집시간 : 2018년 11월 19일 16:06:05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행복한 스웨덴 할머니”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33> 여성 사업가의 길 최춘자 여사
    ‘살려고 일하다보니...“ 딸과 함께 살아낸 끝에 온 지상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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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8-07-21 07:05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 스웨덴에서 산지 60년을 넘긴 최춘자 여사는 스웨덴 이민 1세대이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진 = 이석원)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만 바라보고 있는 딸과 이역만리 여기에서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참 악착같이 일했죠.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살려고 일을 하는데, 일하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다보니 없던 집도 생기고, 부족하던 돈도 생기고, 딸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생기고. 그렇게 나에게 스웨덴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생기더군요. 많이 행복한.”

    스웨덴 이름 춘자 가게르만(Chunja Gagerman). 한국 이름 최춘자 여사(87세. 이하 춘자 씨)는 한국인으로서는 스웨덴 이민 1세대다. 그가 처음 스웨덴에 정착했을 때 학생 몇 명을 제외하고 한국인은 열 명 남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공한 사업가다. 지금도 스웨덴에는 그의 사업의 흔적들이 역력하다. 특히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춘자 씨의 이름에 항상 따라 붙는 게 ‘기코만 간장’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국 간장, 조선간장’이라고 부르던 전통 간장의 상대 개념으로 ‘왜간장’이라고 부르던 일본식 간장이다. 춘자 씨는 스웨덴에 처음으로 그 일본식 간장인 기코만 간장을 들여온 사람이다. 스웨덴의 입맛을 조금 더 동양으로 접근시킨 장본인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는 스웨덴 사람들은 물론, 스웨덴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민의 역사 초기 성공한 사업가’로 기억된다.

    춘자 씨가 스웨덴에 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한국 전쟁이다. 1931년 포도와 복숭아의 고장이며, 호서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 소백산맥의 서쪽 사면인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 태어난 그가 스웨덴을 만난 것은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만들어준 운명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동생 5명과 함께 황간의 산골에서 살던 춘자 씨는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 모두와 함께 추풍령을 넘어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그의 나이 채 스물이 안됐을 때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고향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파괴됐고, 가족들의 추억도 모두 포화에 불타버렸다. 결국 어머니는 춘자 씨와 동생들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무엇이든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 1962년 홍콩에서 남편 홀레르와. 마치 당시의 영화배우를 보는 듯한 전형적인 한국 미인인 최춘자 여사다. (사진 = 최춘자 제공)

    전쟁이 끝난 후라지만 전국의 피난민으로 가득했던 부산에서 춘자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일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그 병원의 약제사인 한 남자를 만난다. 스웨덴 의료부대와 함께 한국에 온 스웨덴 청년 홀레르 가게르만.

    제 아무리 비참한 전쟁에 피난민으로 뒤섞인 북새통이었지만 춘자 씨의 빛나는 미모는 스웨덴 청년의 가슴에 잔잔한 설렘을 줬고,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낯선 이국의 청년에게 마음이 끌린 춘자 씨는 전쟁이라는 그 엄혹함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웠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을 했고, 춘자 씨는 가게르만 부인이 된다. 그리고 1957년 가게르만 부부는 일본을 거쳐 홍콩을 들러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간다. 춘자 씨가 한국에서 스웨덴까지 가는 데는 무려 3개월이나 걸렸다. 물론 남편이 일본에서 사업을 준비하면서 한 달을 보냈지만, 홍콩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싱가포르를 들리고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돌아 스웨덴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 멀고 험했다.

    “스웨덴이 먼 나라인 줄은 알았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배로 간 여정은 정말 길었습니다. 그래도 스웨덴으로 가는 내내 설렘이 가득했죠. 사랑하는 남편과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그 속에서 행복할 나를 꿈꾸면서. 하지만 사람의 일이 늘 희망하는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스웨덴에 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바빴지만 행복했다. 남편과 함께 무역회사 이렉스(Ilex)와 테막스(Temax)를 세웠고, 초기 어려움은 있었지만 곧 안정을 찾은 사업은 희망적이었다. 특히 테막스에서 기코만 간장과 미소 된장 등 일본의 식재료를 수입하는 일을 직접 했던 춘자 씨는 한국에서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여성 사업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1963년 그들 부부에게는 유일한 자식인 딸을 낳고 나서 춘자 씨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다.

    ▲ 스톡홀름 시내 중심인 올로프 팔메스 가타에 살고 있는 최춘자 여사는 일본의 간장 기코만을 처음으로 스웨덴에 들여온 장본인이다. (사진 = 이석원)

    “사업을 하면서 무척 바쁘고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딸이 태어났을 때의 행복감은 90년 가까운 세월을 사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행복보다 더 컸죠.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았죠. 아직까지 딸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지 못했는데, 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그가 딸을 얻고 불과 6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일을 했고, 그 일들이 남편의 몸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결혼하고 15년, 스웨덴에 온지 12년 만에 춘자 씨는 남편을 여의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고,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사망한 후 회사까지도 파산했다. 그때까지도 낯설기만 한 이국의 땅 스웨덴에 덩그마니 남겨진 춘자 씨와 딸은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됐다.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상 모녀의 삶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춘자 씨는 사업가였다. 세상에서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일상인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춘자 씨는 그나마 남아있던 자동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사방팔방으로 팔러 다녔다. 일본에서 물건들을 수입할 때 함께 받아왔던 견본품들이었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됐던 사람들, 레스토랑과 슈퍼마켓을 가리지 않았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렇게 2년을 노력한 끝에 춘자 씨는 다시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이것은 사실상 기적이었다.

    그 뒤로 춘자 씨의 삶은 그야말로 성공한 사업가의 전형이었다. 한국의 김치가 스웨덴에 처음 알려진 것도 춘자 씨 때문이다. 춘자 씨는 베트남 전쟁 때 파병된 한국 군인들에게 지급되던 깡통에 든 김치를 스웨덴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이미 기코만 간장과 미소 된장 등으로 일본의 맛을 전했다면, 김치와 고추장 등으로 한국의 맛도 들여온 것이다.

    ▲ 일본 음식의 기본이기는 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간장 판매를 위해 최춘자 여사는 직접 기모노를 입고 간장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사진 = 최춘자 제공)

    하지만 춘자 씨 또한 남편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세상에 자신이 사는 유일한 이유였던 딸을 제대로 돌볼 수조차 없었다. 연중 수개월을 해외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도 춘자 씨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회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회사를 매각하고 구입한 6층 건물로 시작한 부동산 임대업도 나쁘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부동산 매매업은 춘자 씨에게 경제적인 여유와 함께 시간의 여유도 주었다. 그에게 딸이 좀 더 가깝게 온 것이다.

    “65세가 되고 모든 일에서 은퇴했죠. 스웨덴의 퇴직자의 삶을 시작한 겁니다. 이미 딸도 결혼을 해 두 손녀를 나에게 안겨줬고,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 했던 일들을 내려놓고 ‘잘 살기 위해’ 많은 시간들을 썼죠. 운동과 여행은 가장 스웨덴 사람다운 삶을 줬고, 1년에 2번씩의 한국 나들이는 한국에 있는 형제들과의 행복한 재회를 주었죠.”

    춘자 씨는 5명의 동생 중 1명의 남동생과 1명의 여동생을 스웨덴에 데려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1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다. 이들은 비록 8000km가 넘게 떨어진 거리를 지니고 있지만, 1년에 2번 이상 만나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테니스와 골프, 수영과 밸리 댄스 등도 춘자 씨가 퇴직자의 삶을 즐기는 가까운 친구다. 그는 80세가 넘어서까지 테니스를 즐겼다. 클럽 활동을 통해 노익장(?)을 과시하며 스웨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7세인 지금도 그는 피트니스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며 건강을 유지한다.

    ▲ 이제는 은퇴한 사업가지만 최춘자 여사는 은퇴 이후의 삶이 누구보다 행복한 한국인이다. (사진 = 이석원)

    기독교인도 아닌 춘자 씨는 이스라엘 여행 때 ‘예수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고는 성경을 통독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에서 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고 미켈란젤로의 일생을 공부하기도 했다. 일을 놓고 나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손에 잡혔던 것이다.

    “남편을 여의고 딸을 위해 죽어라 일을 한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스웨덴 사람들은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정말 열심히 일을 하거든요. 나도 스웨덴 사람처럼 일했고, 그리고 지금은 스웨덴 사람과 같이 놀아요. 성공한 사업가니 하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저 삶의 후반부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노인네일 뿐이죠. 그리고 그게 무엇보다도 행복해요.”

    춘자 씨가 딸만큼 사랑하는 두 손녀는 거의 매주 할머니에게 찾아온다. 춘자 씨는 그 손녀들의 얼굴에서 한국에 두고 온 어머니도 보고, 떠나간 남편도 보고, 존재의 이유였던 딸도 본다. 그리고 그는 두 손녀에게서 멀리 있지만 항상 같이 있는 한국도 보고, 언제나 늘 함께 있으면서 편안한 스웨덴도 본다. 춘자 씨는 아직도 인생의 절정에 서 있는 것이다. 언제나 꼿꼿하고 당당하게.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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