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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막염 걸려도 안경 못 쓰는 나라의 탈코르셋


입력 2018.06.18 05:41 수정 2018.06.18 06:00        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닭치고tv>외모 강박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은 이제 시대정신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지상파 뉴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다.MBC 방송 화면 캡처 임현주 MBC 아나운서가 지상파 뉴스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화제다.MBC 방송 화면 캡처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이 직원 용모 매뉴얼을 내부적으로 검토하다 반발 때문에 취소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것이 화제가 된 것은 그 내용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건강하지 않게 보이므로 생기 있는 메이크업으로 나를 단장한다.’
‘립스틱은 누드톤 또는 너무 진한 색상은 피하고 핑크나 오렌지 계열로 화사하게 연출한다. (마스크 착용 시에는 립스틱이 지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틴트 제품을 이용)’
‘웃을 때 돌출되는 뺨 부위를 핑크색이나 오렌지색 블러셔로 생기 있게 표현한다.’
‘근무 시간 중 최소 한 번은 수정메이크업을 해 생기 있는 얼굴 연출을 한다.’

이런 내용으로 알려졌다. 여성 의료인에게 화사한 화장을 강제하는 규정이다. 이에 반해 남성 의료인의 외모 규정은 느슨했다고 한다. 당연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고, 취소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내용을 검토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이런 사건이 일부의 특이한 행동이 아니란 점에 있다. 우리나라에선 여성에 대한 외모 압박이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항공사 승무원을 비롯한 다양한 직종에서 여성의 외모를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규제한다. 한국여성민우회의 2017년 성차별 조사에 따르면 외식업체, 영화관, 피시방 등 다양한 업장에서 여성의 안경 금지, 화장 의무화 등을 시행한다고 한다. 이 조사에서 한 여성 응답자는 결막염에 걸렸을 때조차 렌즈 아닌 안경 쓰기가 쉽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백화점 매장의 과도한 용모, 복장 규제에 반발해 여성 직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적도 있다.

여성을 외모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보편적 문화였다. 학교에서조차 여성 교사를 소개할 때 관리자급 교사가 ‘새로 부임하신 미모의 ~선생님’이라는 식으로 외모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반 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를 평가, 언급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은 외모를 꾸며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켜서 꾸미기도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내면화된 나머지 스스로 꾸미기를 열망하게 되기도 한다. 남들의 시선이 자신의 욕망으로, 즉 타자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될 정도로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큰 것이다.

외모에 대한 강박이 점점 커져 최근엔 어린 학생들이 화장하는 걸 기본처럼 여길 지경이 됐다. 성형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성형외과들이 성업중이다. 다른 나라엔 없다는 한국만의 다종다양한 코스별 화장품들도 호황이다. 외모꾸밈노동의 강도가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탈코르셋’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외모를 꾸미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꾸밈노동 거부 선언이다.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모습이나 화장 안 한 맨얼굴을 찍어 인증하는 유행이 바로 그것이다. 깨뜨린 화장품 병, 부러뜨린 립스틱,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칼, 팔다리와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은 모습 등을 인증하기도 한다.

1968년 미스아메리카 대회장에 일부 여성 운동가들이 난입해 ‘노 모어 미스아메리카’를 외쳤다. 이들은 대회장 밖에 ‘자유의 쓰레기통’(Freedom Trash Can)을 놓고 ‘강요된 여성성의 상징이자 여성 고문의 도구’라며 코르셋, 하이힐, 브래지어, 화장품, 가짜 속눈썹, 잡지 플레이보이 등을 버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탈코르셋 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성에게 꾸밈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남성의 시선에 의한 사회적 코르셋이라며, 그것을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겠다고 하다.

얼마 전에 MBC 임현주 아나운서가 안경 쓰고 뉴스 진행에 나선 것이나, JTBC 강지영 아나운서가 자른 머리카락 사진을 공개한 것 등도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다. 해외에서도 거세게 나타나는 흐름이다. 미국에선 1968년에 여성운동가들이 반발했던 미스아메리카 측이 올해 마침내 수영복 심사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디즈니 실사판 ‘미녀와 야수’에 출연한 엠마 왓슨은 공주 코르셋을 거부했다. 올해 칸영화제에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레드카펫 위에서 하이힐을 벗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외모 강박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은 이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가꾸기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회가 모든 여성에게 외모 꾸밈을 강요해선 안 된다. 대놓고 외모를 평가하거나, 외모로 차별해서도 안 되는 시대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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