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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아닌 중립국에서 북한을 들여다 본다


입력 2018.04.14 05:00 수정 2018.04.14 06:42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27> ISDP 상임연구원 이상수 박사

베이징대에서 공부한 중국통, 스웨덴 최고의 북한 전문가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ISDP연구소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있는 이상수 박사는 북한 전문가이다. (사진 이석원)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ISDP연구소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있는 이상수 박사는 북한 전문가이다. (사진 이석원)

이상수 박사(45)는 스웨덴에서 손꼽히는 북한 전문가다. 다른 스웨덴의 북한 전문가들과 다른 것은 당연히 그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그저 하나의 나라로만 판단하면 한계가 있다. 북한은 남한과 함께 놓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평가해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이상수 박사는 그런 점에 비추어 보아도 스웨덴에서는 최고의 북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북한 전문가로서 두드러진 또 다른 이유는, 그는 중국통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에서 공부했다. 그는 중국에서 중국과 한국을 아우르는 동양사를 공부했고, 그들을 대비해 볼 수 있는 서양사를 전공했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그리고 거기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닌 북한을 공부했다.

최근 북한의 핵 위협과 도발, 북한과 미국의 갈등, 그러다가 평창 올림픽과 함께 갑자기 찾아온 남북의 화해 모드, 거기에 더 나아가 북한과 미국의 대화 조짐까지 북한과 연관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한다. 이제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제3차 남북정상회담, 그 목전에서 이상수 박사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상수 박사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중국 베이징 대학교 1호 유학생이다.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한 게 1992년 8월 24일, 그러나 이상수 박사가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 발을 디딘 것은 10개월 여 앞선 1991년 10월이다.

“중국 유학을 처음 생각한 것은 아버지였어요. 고교 졸업을 앞둔 무렵 산둥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 중국에 유학을 갈 기회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중국 유학이 낯설고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공부를 마치면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경험과 앞으로 많은 잠재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적극 제안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이상수 박사는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미국이나 일본 유학이라면 모를까 왜 하필 중국? 당시에는 중국이라는 명칭도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중국은 중공이었다. ‘다 이긴 한국 전쟁을 뒤집은 적성국’이자, ‘해체된 소련을 이은 공산주의의 사실상 종주국’이며, ‘북한의 친형과도 같은 존재’. 이게 당시 중국에 대한 본질이었다.

이상수 박사는 한국 국적으로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 입학한 1호 유학생이기도 하다. (사진 이상수 제공) 이상수 박사는 한국 국적으로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 입학한 1호 유학생이기도 하다. (사진 이상수 제공)

그러나 1989년부터 중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중국의 엄청난 잠재력을 이미 봤는지도 모른다. 이상수 박사의 아버지는 ‘여행 삼아 한 번만 가보자’고 권했고, 그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베이징에 갔다. 그리고 역시 그의 눈에 비친 중국, 그것도 그 ‘중화’의 중심 베이징은 형편없는 곳이었다. 도로에는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다니고, 문도 없는 공공 화장실에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하며 일을 보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좀 다른 모습도 있었다. 바로 베이징 대학교다. ‘죽의 장막’이라고 여기던 중국의 베이징 대학교에는 ‘공산 독재국가’의 경직된 분위기는 없었다. 자유분방한 대학생들은 고풍스러운 중국 전통 양식들의 강의실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고, 그 속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온 유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며칠 동안의 베이징 여행은 ‘소년 이상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는 결국 베이징 대학교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그의 학생증에 적힌 국적은 ‘남조선(南朝鮮)’이었다. 그리고 학교 측에서도 ‘너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베이징 대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한국 말 소리가 들렸어요. 북한에서 온 제 또래의 유학생이었죠.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알 수 없는 동질감으로 금세 친구가 되었어요. 한 번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한 일본 친구가 ‘만약 너희 둘이 전쟁터에서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고 묻더군요. 전 별 생각 없이 ‘아마도 둘이서 숨어서 서로 지난 애기도 하고 연락처 주고받고 아쉽게 헤어지지 않을까’라고 대답했죠. 근데 그 북한 친구는 ‘아마 상수를 총으로 쏠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상수 박사는 ‘아, 이게 우리와 북한의 차이인가?’하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대답을 마친 북한 친구는 앞에 있던 맥주병을 깨서 자기 허벅지를 찔렀다. 피가 많이 났다. 병원에 데려가 응급 치료를 받게 했다.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 나중에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일본 애에게 그런 질문을 받은 것도 싫었고, 그들 앞에서 같은 동족인 너를 총으로 쏠 거라고 말한 자신이 싫고 분했다’고. 세 번 충격을 받았죠.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오랫동안, 아니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ISDP 연구소 건물. 이 연구소는 스웨덴에서 남북한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기도 했다. (사진 이상수 제공) ISDP 연구소 건물. 이 연구소는 스웨덴에서 남북한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기도 했다. (사진 이상수 제공)

이상수 박사는 베이징 대학교 대학원을 1년 남겨놓은 시점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1년 간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에서 서양의 문화가 동양을 앞서기 시작하는 ‘현장 검증’을 한 셈이다. 피렌체에서 돌아와 서양사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그 대학에서 운영하는 동북아연구소에서 현대사와 지역학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동북아 국가들의 에너지 협력과 동북아 지역공동체 형성의 전망을 중점적으로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런데 석사 과정 중 다녀온 피렌체가 유럽 삶의 촉매제가 됐는지도 모른다.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벨기에 부루쥐에서 박사 후 객원연구원 프로그램으로 일 년 간 연수를 하게 된다. 유엔 지역협력 연구소(UNU-CRIS)에서 유럽과 동북아를 더 깊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2차 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의 화합과 그 후 유럽통합의 과정을 공부하여 미래의 동북아시아 평화와 공동체 형성에 있어 그 방향과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포부가 있었습니다. 유럽은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죠. 그러나 동북아의 각국은 통합의 길보다 경쟁과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저는 유럽과 동북아의 상황에 있어 너무나 큰 차이를 느꼈고 제가 무엇을 제일 먼저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 속한 ‘Institute for SilkRoad Studies’로 가게 됐다. 그곳이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ISDP 연구소의 전신이다. ‘스웨덴 안보개발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Security and Development Policy)’에서 그는 10년 넘게 일하면서 지금은 한반도 연구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ISDP 연구소의 주요 연구 주제는 스웨덴의 평화, 분쟁 방지, 위기관리 등의 학문적 이론과 방법론을 통해 아시아의 분쟁국 간의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ISDP에서는 스웨덴이라는 중립적 성격의 특이성을 활용해 2007년 이래 남북한과 미·중·일 5자가 참여하는 소위 ‘2/1.5트랙’(반관반민) 대화를 연례적으로 주선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당시 남북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는 한국과 북한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채널이기도 했다. 그가 동북아 문제, 특히 한국과 북한의 문제를 스웨덴에서 연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스웨덴은 정치적으로 중립국인 만큼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는 다른 입장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북한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수 박사는 남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아우르는 동북아시아가 보다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사진 이석원) 이상수 박사는 남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아우르는 동북아시아가 보다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사진 이석원)

“스웨덴 사람들이 바라보는 한반도는 아직 분쟁국이라는 이미지, 전쟁의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지역 정도입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자기들처럼 평화를 만들고 안전하게 살아야한다고 얘기하죠.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주변국들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역사적 배경은 생각하지 않고 한국과 북한이 서로 무조건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인 문제점을 다소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인이면서 가장 먼저 중국에서 공부했고, 그리고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서방 세계로 일컬어지는 스웨덴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북한을 연구한다. ‘남북한중일’이라는 동북아시아 4국이 그의 삶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어쩌면 현실 가능할지도 모르는 남북미 3국 정상회담을 보는 시선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상수 박사다. 그럼 그에게 남북의, 그리고 북미의 대화 분위기는 어떤 의미일까?

“증권 회사에서 영업을 하는 친구들은 주가가 많이 오르거나 내리는 단순한 변화는 별 재미가 없다고 얘기하더군요. 주가가 요동쳐야 그 친구들은 진짜 재미를 본다고 해요. 북한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남북이 너무 평온하거나, 심하게 경직돼 있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거예요. 남북 관계가 요동칠수록 한결 해야 할 일이 많겠죠. 하지만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의 하나로 본다면 화해와 영구적 평화의 분위기가 당연히 반가운 일이겠죠.”

스웨덴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스웨덴에서 한국 남자의 삶이란 녹록치만은 않다’며 집안 일 많은 것을 투정하기도 하지만, 스웨덴은 그가 살아본 모든 나라들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나라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남북한의 문제도 그럴지도 모른다. 평화를 향해 가는 길은 일이 너무 많아서 투정을 부릴 때도 있지만, 평화가 정착됐을 때 가장 안정적이고, 지난 70년 넘는 시간동안 쌓여왔던 이념적 스트레스가 완전히 가실 수 있는. 그래서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기에 지금도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한 공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곳 스웨덴에서.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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