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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들에게 스웨덴 동화를 읽게 하고 싶다”


입력 2018.03.03 05:00 수정 2018.04.06 08:37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에서 9년 째 살고 있는 황덕령 씨는 스웨덴이 지니고 있는 여유와 배려, 공공성과 연대성에 깊이 매료돼 있다. (사진 = 황덕령 제공) 스웨덴에서 9년 째 살고 있는 황덕령 씨는 스웨덴이 지니고 있는 여유와 배려, 공공성과 연대성에 깊이 매료돼 있다. (사진 = 황덕령 제공)

“한국은 예쁘고, 다정하고, 밝고, 기분 좋아지는 그런 아동 도서가 대부분이죠. 이해돼요. 어차피 선택하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니까. 그런데 스웨덴은 달라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 주관을 가진 주체로 대하는 그들의 정신이 아동 도서에도 반영돼 있어요. 사회 이슈나 첨예한 논란이 되는 주제들을 특별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스웨덴 생활 9년차 황덕령(36)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런데 아동 도서 번역가이기도 하다. 현재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중첩된다. 하지만 미래의 삶을 가늠한다면 그는 아동 도서 전문 번역가가 맞다. 그는 책의 내용과 정서부터가 다른 스웨덴의 아이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결국 그가 더 마음을 주는 것은 한국의 아이들이다. 한국의 아이들에게 스웨덴의 책을 읽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스웨덴의 아동 도서를 번역하고 있다.

지금까지 덕령 씨가 번역한 스웨덴의 아동 도서는 30여 권에 이른다.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 온 쌍둥이의 이야기를 그린 ‘서란이와 부란이가 왔어요’, 가정 폭력을 다룬 ‘앵그리 맨’, 과학 도서인 ‘빅뱅으로 내가 생겨났다고?’와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 이야기’, 그리고 단순한 수집가에서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아이 쿠베를 그린 ‘쿠베의 박물관’ 등이 그의 손을 거쳐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스웨덴의 아동 도서들이다.

덕령 씨는 ‘말괄량이 삐삐’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또 다른 동화인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감명을 받았다. 아이들 책에서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며 거침없는 상상과 환상을 품게 하는 것에 놀랐다. 스웨덴의 아동 도서에 관심을 가진 계기다. 그저 자신의 관심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아이들이 스웨덴의 아동 도서를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덕령 씨가 그동안 번역한 스웨덴의 아동 도서는 30여권에 이른다. (사진 = 황덕령 제공) 황덕령 씨가 그동안 번역한 스웨덴의 아동 도서는 30여권에 이른다. (사진 = 황덕령 제공)

“스웨덴 지인 중에 정자를 기증 받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싱글 맘이 있는데, 그 분의 집에서 정자 기증 아이들에 대한 동화책을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았죠. 그 집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 책을 꽤 여러 번 읽은 듯 했어요.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임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볼 수 있는 한국이 투영됐죠.”

그런데 알고 보면 덕령 씨가 이런 생각은 오래 전부터 그의 ‘속’에 둥지를 트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스웨덴에서 살겠다는 막연한 생각의 시작점부터.

덕령 씨가 스웨덴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꽤 오래 전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스웨덴이라는 곳을 동경했다. 물론 스웨덴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혼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스웨덴이 어떤 나라인지, 그곳이 왜 좋은 나라인지도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스웨덴의 자연이다. 특히 스웨덴의 그 깊고 평안한 숲이었다.

TV 등에서 본 스웨덴의 자연은, 가장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비단 스웨덴이 아니더라도 한국인들 그런 숲이 없을까 생각도 했지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나보다. 덕령 씨에게 스웨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우선 거기에 있었다.

어린 소녀의 스웨덴을 향한 알 수 없는 동경은 결국 그를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로 진학시켰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덕령 씨는 오랜 세월 꿈꾸던 스웨덴으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덕령 씨는 스웨덴의 중북부 도시 우메오로 단기 유학을 온다. 그게 2004년이다.

현재 황덕령 씨가 근무하고 있는 보쉬 파이낸스팀의 워크숍 때 동료 직원들과 함께 한 모습. (사진 = 황덕령 제공) 현재 황덕령 씨가 근무하고 있는 보쉬 파이낸스팀의 워크숍 때 동료 직원들과 함께 한 모습. (사진 = 황덕령 제공)

“그 전부터 생각했던 그 스웨덴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죠. 우메오에서 1년 있으면서 거의 숲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살아왔는데, 우메오의 숲 속에서는 삶이 단순해지더군요. 그냥 편하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더라고요. 그런 스웨덴의 정서가 저한테는 잘 맞았어요.”

그리고 너무 짧은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을 마쳤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취직을 했다. 외국계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또 그 월급의 금액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답답했다.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닌데, 내가 꿈꾸는 삶은 다른 곳에 있는데......’

결국 4년간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진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고, 그는 2009년 11월 스웨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물론 무작정은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한 대기업의 스웨덴 현지 법인에 채용됐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조건을 만든 것이다. 덕령 씨는 오랜 꿈을 그렇게 이뤘다.

물론 덕령 씨가 스웨덴의 숲과 호수에만 매료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그의 마음에 담겨 있던 다른 것도 있었다. 스웨덴의 시스템이다.

그는 한국에서 힘겹게 생활하는 노인들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들은 결코 젊은 시절 게으르거나 무능했던 것이 아닌데, 지금 거의 90도로 굽어진 허리를 힘겹게 지탱하며 하루 종일 폐지를 주우러 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버티고 사는 것뿐이다. 한국은 이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됐는데, 그런 노인들은 오히려 더 늘어난다. 왜?

황덕령 씨는 재스웨덴 한국학교에서 7년째 스웨덴 성인중급반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 황덕령 제공) 황덕령 씨는 재스웨덴 한국학교에서 7년째 스웨덴 성인중급반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 = 황덕령 제공)

덕령 씨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스웨덴이라는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출생의 자기 선택권을 가지지 못했던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았다. 젊은 시절 죽어라 일했지만 사회의 모순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길바닥에서 굽은 허리를 지탱하고 참혹하게 살아야 하는 노인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웨덴이 문제가 없는 나라는 절대 아니죠. 특히 요즘은 더 어려운 문제들이 많죠. 하지만 스웨덴의 복지와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 내 아이가 잘 되려면 다른 아이들도 잘 돼야 한다는 사고방식, 그런 스웨덴 사회가 가진 연대성과 공공성을 배우고 싶었어요. 교육과 노후 등의 복지마저도 자본주의의 논리로 매몰되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스웨덴에 살고 있지만 덕령 씨는 한국을 잊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스웨덴이라는 사회를 동경해 왔으면서도 스웨덴에 한국을 알리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의지의 실천이 스웨덴 아이들에게 한국의 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덕령 씨는 7년 째 스톡홀름의 재스웨덴 한국학교(한글학교)에서 성인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교생 이상이 그의 한국어 제자들이다. 물론 대부분 스웨덴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고, 한국의 전통 문화도 가르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물놀이다. 대학 시절 배운 사물놀이를 스웨덴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다행히 아주 재밌어 하고, 또 열심히 한다. 그저 취미로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간간히 여러 행사에서 공연도 한다. 얼마 전 스웨덴 한인회의 설날 잔치에도 무대에 섰다. 삼채 장단으로 시작해, 굿거리를 거쳐 휘모리까지 이어지는 장단 바꾸기에도 제법 능하다. 덕령 씨와 아이들의 놀이 한 판은 고향이 그리운 교민들에게는 깊은 향수를,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현란한 재미를 선사해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황덕령 씨의 지도를 받고 있는 재스웨덴 한국학교 사물놀이패. 한국학교의 날 공연을 마친 뒤다. 사진 왼쪽부터 사이먼(Simon), 엘사(Elsa),안톤(Anton), 그리고 황덕령 씨. (사진 = 황덕령 제공) 황덕령 씨의 지도를 받고 있는 재스웨덴 한국학교 사물놀이패. 한국학교의 날 공연을 마친 뒤다. 사진 왼쪽부터 사이먼(Simon), 엘사(Elsa),안톤(Anton), 그리고 황덕령 씨. (사진 = 황덕령 제공)

“한국학교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스웨덴 아이들의 대부분은 K-pop이나 K-드라마 때문에 찾아와요. 아이들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고, 분명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죠. 하지만 그것뿐 아니라 진짜 한국의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사물놀이를 시작했어요. 한국의 아이돌 음악이나 힙합에만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물놀이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한국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애정으로 발전하고 있어서 기분 좋아요.”

누가 덕령 씨에게 ‘스웨덴에서 잘 살고 있나?’ 물어보면 그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남의 나라니까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가 내 등을 떠밀어서 온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결정해서 온 건데 견디지 못할 어려움은 아니다’고 얘기한다.

‘길고 우울한 겨울 날씨나, 인종차별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태도,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두려움과 경계심 등이 없냐?’고 물어도 그는 ‘모르고 오지 않았고, 그게 스웨덴이 아니어도 그런 느낌은 당연히 있을 것이니 내가 극복할 일이다’고 대꾸한다.

덕령 씨는 한국 대기업의 스웨덴 현지 법인 근무 6년 뒤, 지금은 독일 회사 보쉬(Bosch)를 다닌다. 전반적인 프로세스 감사를 주 업무로 하는 파이낸스 파트 오디터(Auditor)로 일한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스웨덴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아동 도서를 번역해 한국의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그런 책들로 잘 꾸며진 어린이 도서관 하나를 만들지도 모른다. 긍정과 여유, 배려와 다양성, 그리고 공공성과 연대성은 어른이 돼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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