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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신삥’을 환영하지 않는다


입력 2018.01.22 09:41 수정 2018.01.29 14:00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뻔뻔하게 바닥에 뛰어드는 배짱을 키워야

세상은 ‘신삥’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늘의 글은 이른바 ‘신삥’들에게 들려주고픈 얘기이다.

군대에선 새로 들어온 병사 즉 신병(新兵)을 ‘신삥’이라 부른다. 격을 낮추거나 깔보는 의미가 담긴 은어이다. 군대가 아닌 곳에선 신참(新參)이 되는 셈인데 이 또한 신삥이라 부를 때가 많다.

군대나 사회가 모두 이처럼 무시하는 의미에서 ‘신삥’이란 단어를 쓰는 데에는 거기에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느 곳이든 신참을 환영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은 필요에 따라 신입사원을 채용한다. 그 기업의 오너는 긴 장래를 보면서 신참을 채용하지만, 그건 오너 입장인 것이고 기존 직원들은 심리가 복잡하고 또 미묘하다.

기존 직원의 경우 부서의 일손이 부족하면 충원을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참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하진 않는다. 신참이 부서에 배치되고 충원되어도 기존 직원의 입장에서 신참이란 존재는 당장 그다지 쓸모가 없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르쳐서 써야 하는 만큼 당장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바빠 죽겠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을 데리고 가르쳐주고 신경을 써야 하며 때론 자상하게 보듬어주어야 하니 부담만 된다. 그러니 좋을 까닭이 없다.

더군다나 신삥을 정성껏 키워놓았다가 나중에 그 신삥 놈에게 자리를 빼앗기거나 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니 기존 직원의 입장에서 신삥을 반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툭 하면 잔심부름이나 잘 하라는 말로 구박을 주기도 한다.

기업 오너는 아니지만 관리자의 입장이라면 조금 생각이 다르다. 조금은 더 아량을 베풀 용의가 생긴다. 밑의 직원들이 신참을 구박하지만 않고 잘 가르쳐서 쓸 수 있게 되면 당연히 관리자에겐 힘이 되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관리자는 중간자적인 입장이다.

어쨌거나 신참을 데리고 일한다는 것은 대단히 성가시고 불편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 성가심과 불편한 심리가 바로 ‘신삥’이란 단어 속에 녹아있는 셈이다.

그래도 대기업일 경우 신참에 대한 구박이 가장 덜한 편이고 중소기업으로 갈수록 사정이 더 각박해진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급여의 액수라든가 장래 비전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중소기업도 그렇지만 특히 신참에 대한 대우가 가장 험한 곳은 공직이나 기업보다 이른바 ‘바닥’이란 은어를 쓰는 세계이다.

가령 어떤 젊은이가 창업을 했다고 하자. 그리고 업종이 서비스업이라 하자. 그러면 그 젊은이는 서비스 업계라는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 된다. 모든 자영업자는 그 바닥에서 나름 성공한 위치에 있지 않은 이상 그 ‘바닥’에 몸을 담은 셈이다.

모든 바닥은 ‘초대장’을 발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바닥에 들어오라고 초대한 적도 없고 바닥에 들어온 자를 환영해주고픈 마음 또한 전혀 없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피 튀기는 경쟁을 하는 마당에 또 하나의 신참자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각자의 몫을 줄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쟤는 왜 하필 이 바닥에 무얼 얼마나 먹겠다고 숟가락을 들고 나타나는 거야! 하는 것이 모든 바닥 사람들의 심리이다. 그러니 환영해줄 턱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신참자나 신삥을 환영하지 않는다. 공직이나 대기업은 여유가 있기에 덜 그런 것이고 중소기업은 좀 더 각박하며 이른바 ‘바닥’이란 곳은 그냥 차가운 눈빛으로 신참을 바라볼 뿐이다.

몇 년 사이 기업 채용이 줄어들자 정부는 ‘젊은이들이여, 창업을 하시오’ 하고 바람을 잡고 있다. 나름 지원책도 다양한 것 같고 또 성공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데 있다는 점이다.

젊은이가 창업한다는 것은 그 분야, 즉 노골적으로 말해서 그 바닥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없이 뛰어든다는 것이 된다. 젊은이 스스로 사전에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해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그 ‘바닥’에선 나를 결코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학생 신분은 어쨌거나 이른바 갑의 신분이고 또 이른바 ‘갑질’을 할 수 있다. (등록금을 지불하는 자는 갑이지 을이 아니다.) 이처럼 ‘갑’만 하던 젊은이가 어느 날 갑자기 ‘을’이 되는 것이 바로 창업이다.

갑만 하던 청년이 공직이나 대기업도 아니고 또 중소기업도 아닌 그냥 그대로 ‘날 것’의 세상인 바닥에 뛰어들었을 때 받게 되는 충격은 실로 엄청나다. 여태껏 한 번이라도 을이 되어 ‘갑질’의 횡포에 시달려본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오늘날 공교육 현장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학생이 예전처럼 선생으로부터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선생, 여보슈, 나를 한 번 잘 가르쳐 보시오, 하는 고자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노동자로서 을이고 학생은 교육소비자로서 갑인 세상으로 바뀌었기에 공교육이 무너졌다.

갑으로서 교육소비자 신분만 누리던 학생들이 이제 학교를 마치고 사회진출을 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을을 해보겠다는 것과 같다. 신삥으로서 출발한다는 것을 을이 되어보겠다는 얘기인 것이다.

사회진출이 달리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세상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삥을 환영해주는 세상은 없는 것이 정상이고 당연하다.

우리나라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일자리가 마구 늘어나고 기회가 더 많아지던 시절, 신삥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리저리 빠져 나갈 공간이 있고 여유가 있었기에 최소한의 겉포장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가 정체해버리자 어딜 가도 신삥을 환영해주는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넌 왜 굳이 이 바닥에 들어오려고 하니? 다른 데 알아봐! 하는 심리만 팽배한 오늘의 현실이다.

예전엔 취업에 있어 본인의 운세가 최악만 아니면 그런대로 그럭저럭 사회진출을 하는데 큰 문제나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본인의 운이 최절정이 아니라면 대기업이나 공직 같은 곳에 쉽사리 발을 들여놓는 경우는 실로 드물다. (몇 년 사이 상담해오면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간 젊은이 중에 운 흐름이 별로인 경우는 아예 본 적이 없다.)

운세가 절정이어야만 그런대로 무난한 사회진출이 된다는 것은 사회 전체적인 효용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것은 결국 써먹기 위함인데, 취업 후 10년만 지나도 그 젊은이들은 운세가 기울어갈 것이니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다. 정작 뽑아먹으려 할 때 나올 것이 별로 없을 것이란 얘기이다.

사람을 가리고 뽑을 때 이른바 ‘아침의 떠오르는 해’를 선택해야 하는 법인데, 현실은 워낙 가려 뽑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서산 너머 지는 해’를 선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최근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친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해지기 직전 광휘로운 노을의 운세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 호호당은 내 또래 일반의 사람들에 비해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그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가 바로 세상이 무섭다는 얘기이다.

당연하지, 이 세상은 신삥을 환영해주지 않아, 뭣이 반갑겠냐고 자네가 자신들의 바닥에 들어오는 것이. 그러니 중요한 것은 야박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네가 치고 들어가 ‘찐따’붙고 또 엉겨 붙어야 하는 거지, 이런 얘기를 자주 해주게 된다.

세상이 발전하고 시장이 커갈 적엔 밥그릇 싸움으로 인한 압력을 미처 잘 느끼지 못했다.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빽빽하게 좁혀진 세상에선 그야말로 어딜 가나 반겨주지 않는다. 집에서 푹 쉬지 왜 이 판에 들어와서 성가시게 하냐고 박대하기 마련이다.

이십대 중반까지 더러 삽십대 초반까지 대학이나 대학원 다니면서 갑만 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을 노릇을 하자니 세상이 당연히 무섭게만 여겨질 것이다. 게다가 며칠 전엔 최근 최저임금 문제로 그나마 원활하던 알바 자리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고 투정하는 젊은이의 얘기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뜻을 품고 동대문에 있는 작은 의류업체에 들어갔던 한 젊은이는 큰 충격을 받고 한 달 만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사람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투명한 공기처럼 대하더란 얘기였다.

그러니 "이불 밖이 무서워"하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오늘의 결론, 젊은이들에게 해주고픈 얘기는 다음과 같다. 세상은 신삥을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환영해주지 않더라도 염치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하면서 뻔뻔하게 바닥에 뛰어드는 배짱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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