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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지금 한다”


입력 2018.01.20 05:00 수정 2018.04.06 08:39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18> 귀국 코앞인 ‘워홀러’ 이강본 씨

통통 튀는 젊음의 산뜻한 한 페이지를 북유럽으로 채운 청년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23살의 청년 이강본. 그는 짜릿했던 스웨덴 워킹 홀리데이를 온전히 가슴에 담고 있다. (사진 = 이강본 제공) 23살의 청년 이강본. 그는 짜릿했던 스웨덴 워킹 홀리데이를 온전히 가슴에 담고 있다. (사진 = 이강본 제공)
“군 복무 중일 때, 제대하면 덴마크에 가서 워킹 홀리데이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는데, 덴마크의 유명 디자이너인 헨릭 빕스코브를 좋아했거든요. 덴마크가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몰랐지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 인생에 스웨덴이라는 세 글자가 적혔어요. 그건 장난 같았고, 그러면서도 운명 같이 느껴졌죠.”

기간 만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스웨덴 워홀러(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 이강본(23) 씨는 현재 스톡홀름 시내 한복판의 한 아시안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 이 레스토랑의 주인은 베트남계 이민 2세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에는 모두 6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 중 3명은 스웨덴 사람이다. 1명은 완전 스웨덴 사람이고, 1명은 스웨덴에서 태어난 베트남 사람, 그리고 1명은 스웨덴에서 태어난 필리핀 사람. 그리고 2명의 필리핀 사람과 이강본 씨까지 4개국 사람이 모여서 일한다.

레스토랑에서 이강본 씨가 하는 일은 의상 디자인과는 ‘1’도 관계없다. 음식을 만들지만 조리사는 아니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들은 굉장히 간단해서 주문이 들어오면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완성된다. 한국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이강본 씨도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강본 씨가 하는 일은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일 뿐 아니다. 면 삶기, 반찬 양념하기, 채소 썰기, 설거지, 식당 청소, 가끔 주문받는 것까지. 말하자면 식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한다.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가 같다.

그럼 왜 이런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것도 자신이 꿈꾸는 미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면서 스웨덴에 있는 걸까?

이강본 씨는 대학교 1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그는 워킹 홀리데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덴마크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패션에 관심이 많은 선임병이 스웨덴을 추천했다. 스웨덴? H&M의 나라? 그 전까지는 거의 생각도 해본 적이 없던 스웨덴에 갑자기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지금 하자’고 결심했고, 스웨덴에만 몰두했다.

지난 여름,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함께.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사진 = 이강본 제공) 지난 여름,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함께.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사진 = 이강본 제공)

군에서 제대한 후 복학을 선택하지 않았다. 곧장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다. 워킹 홀리데이를 한다면서 부모님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1년 동안 스웨덴 생활 초기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그는 스웨덴어 공부에 뛰어들었다.

“스웨덴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스웨덴어는 첫 번째였죠. 스웨덴이 영어를 워낙 잘해서 영어만으로도 취업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웨덴 사람에게도 영어는 외국어잖아요. 우리나라로 돈 벌러 오면서 한국어 한 마디도 못하고 영어로 일하겠다고 하는 외국인이 좋아 보일까요? 우리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스웨덴 사람에게는 좋게 생각하라고 하면 그건 말이 안되는 일이잖아요.”

그는 이미 군대에서 스웨덴어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휴가 때 스웨덴어 교재를 사서 독학했다. 군을 제대한 후 정식으로 스웨덴어학원을 다녔다. 6개월 동안 꽤나 열심히 공부했다. 그와 동시에 스웨덴에 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구했다. 불행히도 그의 주변에는 스웨덴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없었다. 인터넷에서도 정보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스웨덴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다림 끝에 워킹 홀리데이가 승인됐다. 그리고 그는 난생 처음 유럽 땅을 밟았다. 그게 지난 해 4월 5일이었다. 그의 스웨덴 입성은 다소 요란했다. 그가 스웨덴에 도착하고 이틀 뒤 스톡홀름에 테러 사건이 터졌다. 이강본 씨는 사건 현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직 스톡홀름의 동서남북도 구분하지 못하고, 교통편도 종잡을 수 없을 때였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외곽에 숙소를 구했는데, 스톡홀름을 드나드는 모든 대중교통수단이 정지되는 바람에 집에 가는 일 조차 힘들었다. 태어나서 전쟁이란 것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난리 난리, 6.25는 난리도 아냐’라던 어떤 드라마 대사가 생각날 지경이었다.

현재 이강본 씨가 일하고 있는 아시안 레스토랑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진 =이강본 제공) 현재 이강본 씨가 일하고 있는 아시안 레스토랑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진 =이강본 제공)

그렇게 시작한 스톡홀름 생활 초기 이강본 씨는 스톡홀름 알아가기에 시간들을 투자했다. 물론 젊음 고유의 방식으로.

“유럽, 더구나 북유럽은 처음이라 스웨덴에 도착해서 3개월까지는 혼자 여행하느라 신났죠. 거의 매일 밖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사람들이며 건물이며 분위기 등 제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한국에서의 그것들과는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그렇게 석 달을 여행하다가 이제 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구하기 시작했죠.”

이강본 씨는 아시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독특한 경험을 했다. 레스토랑 사장과 직원들 간에 ‘층’이 없다는 것이다. 사장이 하는 일과 직원들이 하는 일의 차이도 거의 없었다. 그냥 모두가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6명의 직원들은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경력도 다른데 다 친구 같아요. 아니 그냥 다 친구에요. 사장이라고 해서 우리 위에 군림하지도 않아요. 사장이나 매니저는 직원이 실수를 해도 화를 내거나 지적하기보다 무엇이 실수였는지, 실수한 직원의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죠. 그것도 상사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의 선경험자의 입장에서. 결국 각자의 맡은 역할이 다를 뿐, 상하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 레스토랑만 그런가요?”

이강본 씨가 느끼는 스웨덴 워킹 홀리데이의 좋은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스웨덴 사회가 이처럼 다양성이 풍부한 사회인 줄 몰랐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이고, 사실상 다민족 국가라고는 생각했지만, 스웨덴은 미국보다 더 다양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스웨덴 사람을 포함한 유럽 사람들은 물론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사람들까지. 세상의 모든 인종,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게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인종차별이나 아랍계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강본 씨 눈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북유럽 특유의 눈빛을 한 젊은이와 히잡을 쓴 여성, 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흑인과 까무잡잡한 피부이 동남아시아 젊은이가 카페 한 자리에 앉아 환담을 나누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아, 이게 스웨덴이구나’하는 생각은 그가 스웨덴에서 외롭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강본 씨의 스웨덴 워킹 홀리데이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알찼다. 스웨덴에서 만나 절친이 된 친구와 함께. (사진 = 이강본 제공) 이강본 씨의 스웨덴 워킹 홀리데이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알찼다. 스웨덴에서 만나 절친이 된 친구와 함께. (사진 = 이강본 제공)

이강본 씨는 3월 말이면 스웨덴에서의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지나간 시간은 그에게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알게 해 주었다. 물론 워킹 홀리데이의 절반은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것들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지난 해 5월 한국 대사관에서 재외국민들의 대통령 선거 참여를 도운 것을 비롯해, K-pop 클럽에서 밤새 놀았던 것, 말도 안되게 거대한 스키장을 경험한 것, 대형 유람선에서 선상 파티를 해본 것 등등. 물론 그 와중에도 일이 구해지지 않아서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가지고 온 돈이 거의 다 떨어져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걱정도 했었다.

그럼 다시 처음의 그 질문. 이강본 씨는 아직 사회 경험도 별로 없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확신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그 젊음의 아주 중요한 시기를 스웨덴에서 ‘허드렛일’일지도 모르는 일을 하고 있다. 왜? 이강본 씨는 워킹 홀리데이 만료를 두 달여 남겨 놓은 시점에 그 답을 얻었을까? 그리고 그의 스웨덴 생활은 행복의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여기에 그렇게 아등바등 남아서 버티며 나는 정말 행복했는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이 시간이 나에게 유용했을 수도 있고, 무의미했을 수도 있죠. 다른 워홀러들이 ‘스웨덴 생활은 정말 고통스러웠어’라고 말해도, ‘스웨덴 워홀은 판타스틱해’라고 말해도 내 생각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지금 했다는 거죠. 그게 제일 중요해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옷에 관한 일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일과 관련해 스웨덴에 다시 오는 상상도 한다. 만약 다시 스웨덴에 온다면 그는 스톡홀름 얼란다 공항에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Hej!!!"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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