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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부끄러워하는 그는, 한국을 사랑한다


입력 2017.12.16 05:00 수정 2017.12.21 17:26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14> 북구 최대 태권도장 운영 다니엘 리

1977년 입양된 스웨덴 무술인 - 한국의 해외입양에 날선 비판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 한인 입양인 다니엘 리 (사진 = 이석원) 스웨덴 한인 입양인 다니엘 리 (사진 = 이석원)
인천공항을 출발한 택시가 연세대 앞을 지날 무렵 잔뜩 긴장한 모습의 손님에게 택시 기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어디 가는 길이세요?” 질문을 해놓고 택시기사는 오히려 자기가 긴장한다. 분명 처음 이 젊은이가 택시에 타서 목적지를 얘기할 때 유연한 한국어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영어로 얘기한 한국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년은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얘기하려고 애쓰는 기운 역력하게 말한다. “부모님 만나러요. 나 스웨덴에서 왔어요.”

1977년 포대기에 쌓인 채 한국을 떠났던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22년 후인 1999년 그의 나이 23살 때. 웁살라 대학교에 다니던 그는 스웨덴 한인입양인협회에 가입하면서 한국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게 됐고, 그리고 다른 한인 입양인들과 함께 서울 땅을 밟았다. 물론 그가 아는 바로는 생전 처음이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난 2006년 5월 그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자신의 친부모님의 집을 찾았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한국의 부모님, 2명의 친형과 1명의 친누나는 그를 아주 밝은 표정으로 맞았다. 거실에는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외국에서 금의환향하는 아들을 맞는 분위기였다. 30년 만에 만난 한국의 가족들과 실컷 웃고, 충분히 행복했다.

스톡홀름에서 북유럽 최대 규모의 태권도장 KSH(Kampsportshuset. 무술관)을 운영하는 다니엘 리(한국 이름 이남원)는 스웨덴의 한국 입양인이다. 1976년생인 그는 1977년 4월 스웨덴으로 입양됐다. 당시 그의 친부모는 매우 가난했다. 다니엘은 그 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당시 그의 친모는 병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다니엘은 스웨덴으로 입양된 것이다.

“스톡홀름에서 서쪽으로 110km 떨어진 에스킬스투나(Eskilstuna)라는 곳이 나의 스웨덴 집이었어요.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죠. 아주 평범한 스웨덴의 평화로운 가정이었어요. 내가 원하거나 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곳이 나의 집이 됐고, 나는 한국인이 아닌 스웨덴인이 된 것이죠.”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았다.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얘기해주었다. 하긴 굳이 부모님이 이야기 해주지 않았어도 스스로 충분히 알 일이다. 부모님과 확연히 다른 외모, 게다가 스웨덴에서 한국 입양인은 지극히 흔한 존재였으니까.

다니엘 리가 운영하는 태권도장 '무술관'은 현재 회원수가 750명으로 북유럽 최대 규모다.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다니엘 리가 운영하는 태권도장 '무술관'은 현재 회원수가 750명으로 북유럽 최대 규모다.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김살 없이 컸다. 학교에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인이 아니고 입양인이라 생기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는 상당수 한국 입양인들이 그렇듯 총명했고, 부모님들의 자랑거리였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이혼을 했고, 이혼 후 다소 무책임해진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자신과 여동생이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를 보는 어머니의 눈길은 늘 사랑으로 가득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10살 무렵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99년 스웨덴 한인입양인협회(AKF)에 가입하면서 더 자세히 한국을 알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 한국문화체험 행사에 참가함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면서 의구심이 생기게 됐다.

“한국을 처음 보는 순간 심한 충격에 빠졌어요.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한 나라죠. 스웨덴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어요. 그런데 왜? 이런 나라가 왜 나를 스웨덴으로 보냈지? 매우 멋있는 한국의 다양한 것들을 보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하지만 어쨌든 처음 접한 한국은 너무 좋았어요. 자주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2005년 그는 AKF 회장이 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한국의 방송사인 SBS에서 연락이 왔다.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의 친부모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SBS와 인터뷰를 했다. “혹시”하는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욕심은 없었다.

그의 인터뷰는 2006년 2월 방송됐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며칠 후 새벽 4시에 SBS에서 전화가 왔다. 친부모를 찾았다는 것이다. 방송에 나온 다니엘을 처음 알아본 것은 그의 형수였다. 남편과 너무 비슷하게 생긴 청년이 시부모 이름을 얘기하자 형수는 그가 30년 전 스웨덴으로 입양된 시동생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5월 다니엘은 서울 서대문구에 살고 있는 친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났다.

태권도 공인 6단인 다니엘 리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태권도 공인 6단인 다니엘 리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류의 신파는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쩔 수 없이 막둥이를 품에서 떼어냈던 친모는 다니엘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집 앞까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어나왔던 친부도 아마 몸을 뒤로 돌려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파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게다가 이 막둥이는 정말 잘 자라줬다. 떼어놓고 입양 보낸 것이 너무 미안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니엘은 멋진 스웨덴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친부모님은 동네방네 다니엘 칭찬으로 하루를 다 썼다. 하지만 그것이 입양 보낸 미안함에 대한 깊은 사과였음을 누군들 몰랐을까.

친부모를 찾고, 조국을 다시 품에 안은 후 다니엘의 삶은 더 흥겨워졌다. 한국의 해외 입양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을 보는 눈도 더 밝아졌다. 급기야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다.

10대 때인 1990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태권도가 현재 공인 6단. 물론 합기도도 4단의 고단자이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뿌리에 근거한 태권도에 더 많은 애착을 가졌다. 어쩌면 태권도에 대한 애착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스웨덴 내에서 제법 유명한 무술인이었고, 태권도 고수였다.

북유럽 최고 명문이면서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웁살라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다니엘은 사업에도 특별한 수완을 보였다. 그리고 태권도에 대한 애정과 사업 수완이 적절히 결합돼 2012년부터 그는 ‘무술관(KSH)’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5년을 운영하는 동안 ‘무술관(KSH)’은 750명의 회원으로 늘었다. 북유럽 최대 규모다. 회원들의 구성도 다양하다. 정통 스웨덴 사람들부터 태권도에 관심이 많고 스웨덴에 사는 다른 외국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재외국민은 물론 한인 입양인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다니엘 리는 한국의 해외 입양 문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사진은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들과 함께 태극전사를 응원하던 모습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다니엘 리는 한국의 해외 입양 문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사진은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스웨덴의 한인 입양인들과 함께 태극전사를 응원하던 모습 (사진 = 다니엘 리 제공)

다니엘은 늘 밝은 표정의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전해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인 입양인들 사이에서는 ‘행복 바이러스’ 역할을 하고, 다른 스웨덴 사람들도 그와 함께 술 마시고, 운동하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대해 스웨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눈빛이 빛난다.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지식을 스웨덴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이 한국에 대해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해외 입양의 문제에 대해서 그는 한국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해외 입양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은 분명 무책임한 나라에요. 1980년대 이전에 한국은 무척 가난해서 해외 입양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지금은요? 저출산이라고 우는 소리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는데, 왜 아직도 스웨덴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로 해외 입양이 이뤄지는 거죠? 왜 그 아이들을 전자제품처럼 비행기에 실어서 해외로 파는 거죠? 한국은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한국 정부가 더 이상 해외 입양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미혼모의 문제든, 사회 양극화로 버려지는 아이들의 문제든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한국은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입양을 보내야 하는 상황도 바뀌어야죠. 미혼모가 다른 사람들의 눈 때문에 스스로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없는 것은,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배려의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인식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해외 입양이 이뤄지고 있는 그런 배경을 한국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현재 스웨덴에는 약 1만 1000명의 한국 입양인들이 살고 있다. 가까운 옆 나라 노르웨이와 덴마크에도 각각 9500여명의 한국 입양인들이 살고 있다. 유럽 전체 6만 5000명 중 절반 가까운 한국 입양인들이 북유럽 3개 나라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어린 아이일 때 조국의 버림을 받았고, 지금도 대한민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한국의 재외동포법은 그들을 재외동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스스로의 치부라고 생각해서 외면하는 것일까? 다니엘은 그런 대한민국의 비정함에 속이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버리고 철저히 외면하는 대한민국을 다니엘을 사랑한다. 그는 대한민국의 법이 어떻든 자신의 뿌리를 한국이라고 믿는다. 순수한 한국의 혈통을 지닌 자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스웨덴 한인 입양인 다니엘 리, 이남원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을 기억해 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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