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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인은 한국의 소중한 재원인데...도대체 왜?”


입력 2017.12.02 05:00 수정 2017.12.21 17:25        이석원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12>남강 AB 창업자 강진중 사장

스웨덴 한국 입양인들 가장 잘 이해하는 성공한 사업가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진 강진중 사장. 그가 운영하는 한국 레스토랑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진 강진중 사장. 그가 운영하는 한국 레스토랑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가인 비르에르 얄스가탄(Birger Jarlsgatan). 그 한복판에서 24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 식당 ‘남강(Namgang)’의 강진중(60) 사장은 스웨덴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다. 스톡홀름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 스톡홀름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강’에 들렸고, 만약 그랬다면 한 번 쯤은 인사를 나눴을 인물이다.

사업의 영역에서 그는 비단 스웨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 Federation of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 옥타) 유럽 담당 부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 사장은 ‘독한 사람’으로 불린다. ‘잠에 인색한 사업가’라고도 하고, 살짝 아부성 별칭으로는 ‘스톡홀름 정주영’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수식어들은 한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 사업을 해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남강’을 오픈한 이후 3년 간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독하다’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왜? 세계에서 개인의 노동 시간이 가장 적은 나라인 스웨덴에서 그는 왜 잠을 안자가며 사업을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거둔 성공이 스웨덴 사회에서도 유의미한 것일까?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하고, 섬진강을 따라 재첩의 향기가 남다른 경남 하동이 고향이다. 강 사장은 그곳에서 10남매 중 아홉 째로 태어났다. ‘다복하다’는 표현은 낯설다. 본인의 표현대로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엄~~~청‘ 가난’한 집이었다. 뭐 먹을 것 하나가 생겨도 강 사장에게 차례가 돌아오기는 쉽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서울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집안의 도움이란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의 몸으로 막노동 등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스스로 벌어 공부를 했다. 그러니 어쩌면 스웨덴 사회보다 더 혹독한 인생의 시험을 한국에서 어린 나이에 먼저 겪은 셈이다.

그러다가 그는 서울의 한 특급 호텔 일식부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살아보겠다고 고향을 박차고 서울로 향했던 그의 발끝이 해외를 겨누었다. 새로운 목표를 세운 것이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쿠웨이트로 가서 돈을 좀 벌고, 스위스 로잔에 있는 인터내셔날 호텔 학교로 유학을 가자고.

지난 해 세계한인무역협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강 사장. (사진 = 강진중 제공) 지난 해 세계한인무역협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강 사장. (사진 = 강진중 제공)

그런데 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스위스가 아닌 스웨덴. ‘홀연히’ 나타난 한 지인의 “스웨덴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권유. 그리고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스웨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톡홀름 브롬마 공항에 발을 내디딘게 1982년 6월이다.

“스톡홀름의 일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당시는 스웨덴에 노동 인구가 부족해 이민자들을 환대하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은 그것과 상관없는 나의 몫이었으니까요. 어렵게 학업을 마치는데 10년이 걸렸고, 학업을 마친 후 곧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93년 좌석 24개 짜리 작은 식당 ‘남강’을 오픈했다. 그는 스웨덴 사회에서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성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스웨덴인데, 그리고 월급쟁이가 아닌데. 그는 성공을 위한 시간으로 3년을 잡았다. 그리고 목표를 세웠다. 3년 간 하루 4시간 이상은 자지 않으리라.

3년을 각오했는데 성공은 1년 만에 그의 손을 잡았다. 24석짜리 작은 식당에는 하루 400명의 손님이 몰렸다. 게다가 1930년 이래 최악의 스웨덴 경제가 강 사장에게는 기회였다. 간이 식당 수준이던 강 사장의 ‘남강’은 스웨덴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확장됐다. 남강의 성공을 발판으로 남강 AB를 설립한 강 사장은 한국의 한 소주 브랜드의 유럽 유통을 담당하고, 북유럽의 참나무를 한국에 공급한다. 한 해 매출이 800만 달러에 이르렀고, ‘남강’은 매출 규모로는 스웨덴 상위 3%에 드는 식당이 됐다.

“스웨덴에서 사업을 하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죠. 머리로 도전하는 사람과 몸으로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경험으로 보니 머리로 도전하는 사람이 몸으로 도전하는 사람보다 성공률이 낮더라고요. 머리도 중요하지만, 몸을 움직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웨덴 사람이 아니면서 스웨덴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려면 이들보다 스웨덴에서 적게 산 세월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제가 성공한 비결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 때 그는 스웨덴 한국 입양인들과 함께했다. (사진 = 강진중 제공) 지난 해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입양인대회 때 그는 스웨덴 한국 입양인들과 함께했다. (사진 = 강진중 제공)

강진중 사장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더 있다. ‘한국 입양인들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그는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입양인들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왜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대하지 않는가?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지의 고려인 3세 4세도 법적으로 ‘재외동포’로 인정을 해주지만 입양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는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줄여서 ‘재외동포법’ 제2조 2항에 보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정부 수립 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를 외국국적동포, 재외동포라고 한다. 입양인들은 법적 부모가 한국 국적을 보유한 적이 없던 외국 사람이라 그들에게서 한국인의 흔적을 법적으로 지운 것이다.

강 사장이 스웨덴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어린 한국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한국 말을 전혀 못한다. 이민 2세쯤으로 생각한 강 사장은 그 친구에게 호통을 쳤다. ‘아무리 여기서 태어났어도 어떻게 한국 말도 몰라?’. 그런데 그는 스웨덴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한국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입양인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 강 사장은 그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 친구는 ‘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으니까.

강 사장에게 아픈 기억이 있다. 경남 하동 찢어지게 가난한 집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난 그는 입양될 뻔 했다. 부모님은 입 하나라도 덜자고 그를 입양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다. ‘피죽을 끓여먹을 지언정 함께 살자’고. 그 어린 입양인을 봤을 때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감정이입이 됐다. 그리고 그것은 동병상련으로 전이됐다.

“현재 스웨덴에 한국인, 또는 재외동포인 한국인이 3100명 쯤 살죠. 그런데 한국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웨덴인이 된 한국인이 1만 1000명입니다. 3배가 넘죠. 어렸을 때는 다른 외모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스웨덴 사람이고 싶어해요.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한 이후에는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이 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고, 한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 스웨덴에 왔을 때는 분명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 여권이 소멸되면서 그들은 한국인의 흔적마저도 소멸 당한 거죠. 자신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부인 강재숙(한국식 이름 양재숙) 씨와 단란한 모습의 강진중 사장. 강 사장은 자신의 성공 뒤에 부인의 엄청난 내조가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 강진중 제공) 부인 강재숙(한국식 이름 양재숙) 씨와 단란한 모습의 강진중 사장. 강 사장은 자신의 성공 뒤에 부인의 엄청난 내조가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 강진중 제공)

1994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 사장의 입양인 후원 활동은 스웨덴 한인입양인 후원회 설립에 이어 유럽 한인 입양 청년 체육회로 확대된다. 강 사장은 입양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았고, 이들은 사비를 털어 거의 매년 유럽 각국을 돌며 입양인과 현지 한인들이 어우러지는 체육과 문화 행사를 연다.

강 사장과의 인터뷰 중에 ‘남강’을 찾은 두 명의 한국 입양인은 굳이 강 사장 인터뷰에 끼어든다. 그들에게 기울인 강 사장의 노력을 어렵게 생각해낸 한국말 ‘헌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 날 사망한 한 한국 입양인의 소식을 전한다. 강 사장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강 사장은 한국 입양인이 세상을 뜬 자리나, 한국 입양인이 결혼을 하는 자리, 그리고 한국 입양인끼리 결혼한 커플의 아이 돌 잔치 등 ‘그들’ 속에 늘 있었던 것이다.

“스웨덴의 한국 입양인들은 소중한 한국의 재원입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스웨덴 사회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의 유의미한 구성원으로 자랐습니다. 그 어떤 외교관보다도 한국과 스웨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한국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도 이들을 재외동포로 인정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스톡홀름 한국 레스토랑 ‘남강’의 강진중 사장은 스웨덴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다. 그리고 그는 재스웨덴 한국 입양인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는 앞으로도 한국과 스웨덴을 오가는 사업가로 활동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가장 희망하는 것은,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스웨덴인이 돼 버린 입양인들도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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