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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혜택, 스웨덴서 자영업자로 산다는 건...


입력 2017.11.11 05:00 수정 2017.11.21 13:17        이석원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10>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 이찬희 대표

시민 속이지 않는 국가의 시스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사업의 기반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명한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찬희 대표. 세계적인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손에서 소프트웨어 전문가였던 그는 기업과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창업 프로그램으로 스웨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얻었다. (사진 = 이석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명한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찬희 대표. 세계적인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손에서 소프트웨어 전문가였던 그는 기업과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창업 프로그램으로 스웨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얻었다. (사진 = 이석원)
“회사를 그만 두고 내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그것도 완전히 낯설고 생소한 분야인 식당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 어렵고 힘든 걸 니가?’라고 했죠. 자영업자의 비율도 무척 낮은 편이고요.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 속에서도 자영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국가의 시스템 때문입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거리인 스베아베겐(Sveavägen) 부근에서 한국 음식점 ‘코리아 하우스(Korea House)’를 운영하고 있는 이찬희 대표(56)는 스웨덴의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크다. 스웨덴으로 이주한 후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하기만 했던 그에게 창업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스웨덴이라는 국가의 뒷받침이 용기를 갖게 해줬고, 또 성공의 밑거름을 만들어줬다는 믿음이다.

이찬희 대표가 스웨덴에 온 것은 37년 전인 1980년 11월. 막 스무 살이 된 그에게 한국이라는 사회는 불확실의 공간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부모님이 스웨덴 이민을 결행하고, 먼저 영주권을 취득한 후 이 대표를 부른 것이다. 난생 처음 외국에서 살게 된 것이지만, 막연하게나마 알던 스웨덴은 그에게 두려움이나 낯설음보다는 희망과 기대의 대상이었다.

이 대표는 스웨덴으로 이주하자마자 국가 시스템의 혜택을 누렸다. 빠른 시간 안에 스웨덴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고, 차곡차곡 스웨덴의 교육 시스템을 타고 올라가면서 결국 스톡홀름 대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는 문과생이었던 그가 과감하게 컴퓨터를 전공하게 된 것도 IT에 대한 스웨덴의 관심과 투자 때문이었다. 스웨덴의 교육 환경은 그가 낯선 컴퓨터 앞에서의 새로운 공부라는 두려움을 제거해줬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그가 사회에 나와서 선택한 회사는 세계적인 통신회사인 에릭손(Ericsson). 1876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통신회사인 에릭손은, 스웨덴 GDP는 물론 시가 총액의 30~40%를 차지하는 기업 가문 발렌베리 그룹의 일원이다. 스카니아, 볼보, 이케아 등과 함께 지금도 스웨덴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기업 상위권에 속한다. 이 대표는 에릭손에서 소프트웨어 컨설턴트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1994년 그는 갑자기 한국행을 감행한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부인 이영주(한국 이름 박영주. 54) 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스웨덴 최대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설계 전문가가 된 그를 한국의 삼성전자가 선택했다.

하지만 6년여 한국 생활에서 한계는 전혀 엉뚱한데서 왔다. 중학교 입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아들들의 교육에 대한 부인 이영주 씨의 걱정이 그것이었다. 그 동안 느낀 한국의 교육은 문제가 심각했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힘겹게 했고, 그것은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국가의 시스템이 아이들을 평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내는 자신이나 내가 겪었던, 하지만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계속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의 과도한 경쟁적인 교육을 힘들어했어요. 남들은 한국에 살다가도 교육 환경이 좋은 나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스웨덴의 좋은 교육 환경을 놓고 굳이 스웨덴 시민인 우리가 한국에서 아이들을, 그리고 부모까지도 힘겨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거죠.”

이찬희 대표와 부인인 이영주 씨(사진 오른쪽). 두 부부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정이 스웨덴의 시스템을 적절히 이용하고 적용해 자영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사진 = 이석원) 이찬희 대표와 부인인 이영주 씨(사진 오른쪽). 두 부부는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정이 스웨덴의 시스템을 적절히 이용하고 적용해 자영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사진 = 이석원)

고국에서 완전히 자리 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이 대표에게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의 ‘폭력’적인 교육 환경에 아이들을 맡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다시 돌아온 스웨덴에서 다시 이 대표가 일할 수 있었던 곳은 그 에릭손이었다.

그렇게 에릭손에서의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또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2008년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 위기는 유럽은 물론 재정건전성이 가장 안정적인 스웨덴까지도 위기 로 몰아넣었다. 상당수의 기업들은 직원을 줄여야만 했고, 에릭손도 그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구조조정의 태풍 속에서 이 대표는 과감하게 퇴직을 단행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에릭손은 퇴직을 결정한 이 대표에게 1년 6개월 동안 월급을 그대로 주면서 창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2009년 6월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지만, 이 대표의 퇴직이 결정된 것은 2010년 10월이었다. 그의 인생 터닝 포인트가 된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를 오픈하면서 비로소 그의 에릭손과의 인연이 끝난 것이다. 원래 스웨덴에는 퇴직금이라는 제도가 별도로 없지만 에릭손은 그가 퇴직하던 날 6개월 치의 월급을 일시불로 지급했다. 총 2년 치의 월급은 그가 코리아 하우스를 창업하는 종자돈이 된 것이다.

“에릭손에서 해 준 것 외에도 당시 스웨덴 정부는 자영업자를 위한 별도의 보조금을 지급했죠. 지역고용사무소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니 내 사업계획서를 민간 컨설팅 회사에 넘겼고, 거기서 내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과 함께 1주일 후 9만 크로나(현재 원화 기준 1200만원)의 상환이 필요 없는 무상 보조금을 지급해줬어요. 물론 그 전에 사실상 에릭손 퇴직이 결정된 후 실업보조금으로 9만 크로나를 받은 것은 별도고요. 2년의 창업 준비 기간 동안 더 많은 것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게 창업한 이찬희 대표의 코리아 하우스는 스톡홀름에 몇 개 안되는 한국 식당 중 가장 유명한 식당이 됐다. 현재 스톡홀름에는 채 10개가 안되는 한국 식당이 있다. 그 중에서 완전히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은 절반 정도다. 코리아 하우스는 그 중에서 3번째로 오래된 한국 식당이다. 요즘 스웨덴 사람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쾌 높은 것을 감안하면 그의 한국 식당 창업은 현명했다. 실제 식당을 찾는 손님의 80% 이상이 스웨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코리아 하우스의 한국 음식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표시한다.

스웨덴에서의 삶이 쉽고 편안했던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찬희 씨는 그런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신앙, 그리고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사진 = 이찬희 제공) 스웨덴에서의 삶이 쉽고 편안했던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찬희 씨는 그런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신앙, 그리고 국가의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사진 = 이찬희 제공)

“전반적인 식당업의 폐업률이 낮지 않은 편이죠. 태국이나 중국 등의 아시안 음식점들 중에서는 1년 안에 페업하거나 주인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 식당의 경우도 지난 30여년을 놓고 봤을 때 사라진 식당들이 적지 않아요. 스톡홀름에는 알게 모르게 한국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스웨덴 사람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요. 그래서 코리아 하우그는 물론이지만 다른 한국 식당들도 폐업 없이 잘 운영됐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한국 식당의 존재 자체가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하지만 명확한 한국 알리기이거든요.”

이찬희 대표는 몇몇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 특히 스웨덴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스웨덴의 물가가 너무 비싸다느니, 스웨덴의 봄 가을 겨울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우울하다느니, 스웨덴 사람들의 인종차별이 심해졌다느니, 스웨덴이 외국인에게 취업의 문을 열지 않는다느니 하는 그런 류의 불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살기로 한 사람이라면 스웨덴에 대해서 아주 작은 것까지도 다 알아보고 오죠. 제가 올 때와는 달리 인터넷에는 그 모든 정보들이 있잖아요. 스웨덴의 장점과 단점을 다 알고 온 건데, 스웨덴에서 2, 3년 정도 사신 분들 중 그런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아요. 알고 왔으면 자신의 선택이었던 것이고, 모르고 왔다면 게으름이죠. 스웨덴은 많은 단점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시스템은 시민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어요. 그리고 그 시스템의 충분한 혜택을 받고 못받는 것 또한 개인의 몫이에요.”

이찬희 대표는 스웨덴에 와서 세금도 많이 냈고, 낯설음에 의한 고충도 적지 않았지만 시민을 속이지 않는 국가의 시스템 때문에 많은 것을 받고, 충분히 누리면서, 확실한 행복을 가지고 산다고 말한다. 국가는 주려고 하지만 개인이 선택하지 않는데도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없다면 스웨덴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그때는 선택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모님은 스웨덴 이주를 선택했고, 부모님의 결정에 감사하며 스스로도 스웨덴을 선택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한국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의 행복을 취할 수 있었고, 그래서 스웨덴 속에서 또 다른 ‘한국의 삶’을 살 수도 있게 됐다. 이찬희 대표는 한국인이었던 자신이 선택했고, 그래서 완벽한 그 혜택을 받은 스웨덴 시스템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 사회도 지금보다 조금 더 자신들의 구성원을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를 기원한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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