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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협상 요구는커녕 되치기 당한 문재인 정부


입력 2017.10.09 15:42 수정 2017.10.16 09:49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2011년 "이런 조약 다있나" 일갈해놓고 이젠...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과 우방에 신의와 원칙 지켜야

지난 7월 1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30일 오전(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로즈가든으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7월 1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30일 오전(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로즈가든으로 들어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이 당이 배출한 대통령은 ‘재협상’을 아주 선호하는 듯하다. 이미 20년쯤 지난 이야기가 됐지만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조건이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다며, 당선되면 재협상을 하겠다고 밝혔었다.

제15대 대선을 닷새 앞뒀던 1997년 12월 13일 오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김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원탁에 둘러앉았다. 이 후보가 김 후보의 ‘재협상론’을 비판하자 김 후보는 “합의를 전면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추가협상을 하자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대통령과 3후보는 ‘합의사항 준수’ 공동발표문을 도출해 냈다.

김 후보는 당선과 동시에 ’재협상론‘을 거둬들였다. 첫 기자회견에서 “IMF와의 협약을 철저히 이행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관계 법안이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훗날 IMF 합의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지만 김 전 대통령의 대응은 적절했다. 만약 후보 적의 지론대로 재협상을 시도했더라면 외환위기 극복에는 더 오랜 시간과 고통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모욕적인 언사 서슴지 않더니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둘러싸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대결양상이 험악해졌다. 진보좌파는 한미FTA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면서 원천봉쇄를 시도했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협정이 채결될 경우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에 흡수되고 노동자는 대량해고 상태에 직면할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우리 측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캐런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한미FTA 타결‘을 선언(07년 4월 2일, 공식 서명은 6월 30일)했다.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급등세를 보인 점이었다.

그 후에도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다. 미국의 요구로 개정 협상 절차를 거쳤어야 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5월 초 이후 100여일은 촛불집회로 온 나라가 홍역을 치러야 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는 ’뇌송송 구멍탁‘이라는 괴담이 인간광우병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심을 증폭시켰다.

한미양국간의 추가협상은 09년 12월에 타결됐다. 그리고 미국의회는 11년 10월 이행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 국회의 비준은 그 다음 달에 이뤄졌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단독처리였다. 이날 본회의장에서 당시의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터뜨리는 소동을 벌였다. 그 전해 12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안팎에선 해머와 전기톱이 난무했다. 야당 당직자들까지 가세한 국회의 자해행위였다.

민주당 등 진보좌파 정당들의 한미FTA 악감정은 그 후로도 변하지 않았다. 바른정당 이종철 대변인이 기억해 낸데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한미)FTA가 서로 상호적이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은 거예요. 세상에 무슨 이런 조약이 다 있어!”라고 일갈했다. 그는 또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한 관료들에 대해 “친미를 넘어서 숭미라고 할 정도, 아니 종미다”라는 말로 모멸감을 안겼다.(그랬던 문 대통령이 지난 4월 28일 대선후보 토론 때는 “한미 FTA를 체결한 사람이 우리 아니냐”며 연고권을 주장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문 대통령도 후보 때는 ’재협상파‘였다. 2012년 11월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였던 그는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독소조항 재협상’의지를 밝혔다. 그랬던 그가 집권 후엔 이를 요구할 뜻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이런 조약이 다 있어”라고 분개하던 때와는 달리 협정 폐기를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람의 기억은 희미해지다가 지워져 간다. 무엇인들 잊히지 않으랴. 그렇다 해도 문 대통령이 한미FTA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소동을 잊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심한 모욕을 안기고 그처럼 격한 공격을 퍼부었으면 국민 앞에 해명하고 짧게라도 사과 정도는 할 일이다.

괴담 퍼뜨리던 그들은 어디에

(이미 전 정부 때 한미 간 합의가 끝났을 사드배치를 두고도 문 대통령은 ‘불의의 일격’을 가했다. 세상이 다 알게 도입되어 보관 중이던 미 배치 4기에 대해 보고를 못 받았다며 경위 조사를 지시했다. 1개 포대를 다 갖추기 전에 환경영향평가부터 해야 한다는 방침도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한미FTA 폐기를)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 관계자들은 “FTA 폐기를 위한 내부 준비가 많이 진척됐으며 이르면 다음 주에 공식적인 폐기 절차가 시작될 수 있다”고 거들었다. 우리 정부는 장기(長技)인 ‘대들기’를 포기하고 재협상에 얌전히 응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대표적 진보좌파인사들의 남을 대하는 태도다. 만약 우리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절연하고 중국과 결연할 경우,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인지는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말해 준다. 영화 ‘남한산성’이 보여준 바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내부의 경쟁상대 흠잡을 핑계만 찾아냈을 뿐 침략자 청나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중국이기 때문인가.

북한 전체주의 체제와 그 전제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핵실험, 미사일 발사가 거듭되는데도 싫은 소리 한 마디하기를 너무 힘들어 한다. 입에 ‘인권’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사이비 신정체제의 폭정아래 신음하는 2천 수백 만 동포들의 참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인도적 지원을 하려고 하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인가? 그게 독재 비용, 핵무장 비용의 간접적 지원임을 정말 몰라서 그러는지 묻고 싶어진다.

“한반도 평화는 무력으로 오지 않는다. 평화와 협상이 고통스럽고 더디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한미 동맹도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동맹이다.”

굳이 언제 한 말이라고 할 것 없이 이는 문 대통령의 일관된 인식이다. 그러니 통일외교안보 특보라는 사람이 “동맹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말을 왜 안 하고 싶겠는가. 묵자는 침략전쟁을 반대한 중국 전국시대의 평화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도 방어전쟁은 인정했다. 그런데 우리의 평화주의자들은 방어전쟁까지도 꺼린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의 화두를 붙잡고 있으면 김정은이 감화되어 핵위협과 폭정을 포기할 것으로 믿는 다는 것일까.

만약 동맹체제가 깨지면 우리는 저 막무가내 북한 폭압집단을 무슨 수로 제어하거나 설득할 것인가. 중국의 힘을 빌려 북한을 달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중국에 무엇을 주면 될까?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말했다는 ‘역사적 속국’의 지위를 인정해 주면 되려나? 중국이 우리에게 살가운 이웃이었던 적은, 그 긴 역사 속에서 단 하루도 없었음을 명심할 일이다.

신의를 잃으면 동맹 못 지킨다

어쨌든 정부는 이제 북한의 핵위협과 함께 미국의 FTA 재협상 압력에 맞서야 할 상황에 처했다. 갈수록 곤고해지기만 하는 정부의 처지가 안쓰럽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안으로는 국민, 밖으로는 우방국들과의 신의를 세우고 지키는 일이다. 트럼프의 장사꾼기질이 한미관계를 어렵게 만든다고들 하지만 기업가를 상대하는 데야말로 신의보다 나은 수단이 없다. 기실 세계 모든 나라의 정상들은 장사꾼이고 장사꾼이어야 한다.

정치의 요체는 신(信)이라고 했다. 공자는 병(兵)과 식(食)을 버리더라도 신만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유가와 대척점에서 전통적 가치·질서체계의 쇄신을 부르짖었던 묵가가 신의(信義)의 실천에서는 더 철저했다.

묵가의 거자(鉅子: 영도자)로 맹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형나라(초나라)의 양성군과 신의로 맺어진 사이였다. 양성군이 죄에 몰려 도망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성을 맹승에게 맡겼다. 그런데 지켜내지 못하게 됐다. 맹승은 자결로 친구에게 사죄하려 했다. 제자 서약이 극구 만류했다. 맹승이 타일렀다.

“우리가 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훗날 누가 우리 묵도(墨徒)에게 배우거나 친구가 되려 할 것이며 누가 군신의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냐.”

이 말에 서약은 “과연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먼저 죽어 명부의 길을 열겠습니다”라며 자결했다. 맹승은 송나라의 전양자에게 거자의 자리를 넘겨주는 편지를 보내고 죽었다. 제자 83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송나라에 심부름을 갔던 두 제자도, 새로 거자가 된 전양자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돌아와 스승의 뒤를 따랐다. 극단적 명분론에 구애된 탓이었던지, 아니면 신앙결사체화 한 때문이었던지, 묵가의 세력과 사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의는 지금도 엄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마찬가지다. 동맹을 맺었으면 결코 그 신의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게 부담스럽다면 차라리 동맹을 깨는 게 옳다. 동가식서가숙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미국이 눈치 못 채게, 중국이 감지하지 못하게 구사할 수 있는 꾀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입지를 명확히 하고 나면 방법도 분명해 진다. 당연히 문제도 풀린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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