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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하는 일’ 아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입력 2017.09.23 05:00 수정 2017.11.09 17:39        이석원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3> 30년 경력 스웨덴 사회복지사 윤영희 씨

스톡홀름대 유학으로 시작한 험난한 스웨덴 삶, 결국 가족으로 완성

외교부의 2015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2789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스웨덴에서 사회복지사로 35년 째 살고 있는 윤영희 씨 (사진 = 윤영희 제공) 스웨덴에서 사회복지사로 35년 째 살고 있는 윤영희 씨 (사진 = 윤영희 제공)
정확히 35년 전, 그녀가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그게 한국과의 긴 이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고, 그 공부가 스웨덴이라는 낯선 땅에 있었고, 그리고 그 공부를 마치면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스웨덴에서 살고 있다.

윤영희 씨(62)가 스웨덴으로의 유학을 결행한 것은 1982년 8월. 주위 사람들은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아바를 좋아하던 친구들, 또 테니스 스타 비외른 보리에 열광하던 친구들, 또는 영화광 중에 잉마르 베리만이나 잉그리드 버그만 정도를 좋아하던 친구들은 있었지만 그들과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연결 짓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왜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했고, 또 결행했을까?

윤영희 씨가 스웨덴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복지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30년의 세월을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1982년 스톡홀름 대학교에 유학을 가 사회복지를 공부했고, 그 길로 사회복지사의 길을 걸어 30년이 넘는 세월을 세계 최고의 사회복지 국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물론 대학이 완전히 무료일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돈까지 주는 스웨덴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력적인 나라죠. 하지만 그보다도 사회복지를 세계 최고의 사회복지 국가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더 설레는 일이었어요. 사실 ‘수영도 못하지만 물속에 뛰어들어보자’는 마음도 강했답니다. 여자로서 한국을 살아나간다는 것은 수영도 못하면서 물속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도 절실했거든요."

그녀가 스웨덴 행을 결심했을 때, 한국이라는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힘겨움의 대상이었다. 지루한 20년이 넘는 군사독재라는 정치적 상황도 그렇고, 여성에 대한 험악한 편견과 차별은 자존감 강한 그녀에게는 숨 막히는 폐쇄된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가 하고 싶었던 사회복지의 학문도 그렇다. 한국은 ‘이론은 있지만 실천의 공간이 절대 부족’한 제한된 사회였다. 당시라면 복지라는 건 그저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이론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역시 그녀의 판단은 맞았다. 스웨덴은 사회복지라는 공부를 학교 뿐 아니라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비록 가족과 떨어지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가며 이방인의 공부를 했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윤영희 씨와 남편 미카엘. 두 사람은 에티오피아에 있는 아파르라는 부족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스웨덴에서  국가지원을 받는 단체에 가입했다. 사진은 지난해 7월에 아파르 족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 윤영희 제공) 윤영희 씨와 남편 미카엘. 두 사람은 에티오피아에 있는 아파르라는 부족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스웨덴에서 국가지원을 받는 단체에 가입했다. 사진은 지난해 7월에 아파르 족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 윤영희 제공)
그녀는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남편 미카엘 에크(Mikael Ek)를 만났다. 미카엘은 ‘말괄량이 삐삐(스웨덴 원제 : Pippi Långstrump)의 저자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고향인 스몰란드(Småland) 빔멜뷔(Vimmerby) 출신이다.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 기숙사에서 만났다. 12명이 함께 생활하는 아파트형 공간이었는데, 남편은 유독 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미카엘의 관심은 윤영희 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건 사랑이 됐다.

‘공부만’은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자라 싱그러운 ‘가족’이 됐다. 자신이 하고 싶던 사회복지 공부와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함이 덕목인 나라에서의 삶에 스웨덴 여름의 초록을 닮은 가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1991년 첫 아들 아우구스트 남기 에크(August 남기 Ek)가 태어나고 3살 터울로 딸 린네아 은혜 에크(Linnea 은혜 Ek)와 또 하나의 아들 요나스 인기 에크(Jonas 인기 Ek)가 태어났다. 결혼을 한 후에도 윤영희 씨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여성의 독립성이고 권리였다. 남편도 동의했다.

“아이들은 잘 자라줬어요. 스웨덴 아이들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 외모 때문에 힘들었을텐데, 엇나가거나 방황하는 것도 없이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는 숲속의 나무처럼 잘 자라줬죠. 자녀들이 어려운 일을 겪어서 부모들이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사회복지제도가 돼 있거든요. 그리고 나름대로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개척해나가고 있어요. 그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속에서 내가 스웨덴 삶을 선택한 것이 좋은 결정이었음을 늘 느끼고 있죠.”

27살의 큰 아들은 공과대학을 졸업해 컨설팅 회사에서 일한다. 얼마 전까지 독일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스톡홀름에 있다. 24살의 딸은 스웨덴의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엄마를 닮아 자존감이 강한 딸은 엄마와 대학교 동문이다.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21살의 막내 아들은 K-pop에 관심이 많다. 4학년부터 9학년(중학교 3학년)까지 음악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K-pop에 흠뻑 빠졌다.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윤영희 씨가 지금 하는 일은 웁란드-브로 코뮌(Upplands-Bro kommun 기초자치단체)에서 지적 신체적 장애인들의 복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결같이 해오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의 사고로 따진다면 ‘전문가 중 전문가’다.

“스웨덴의 모든 복지는 국가와 코뮌이 운영하죠. 일관성을 가지고 질서 있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누가 정권을 잡든지 스웨덴의 노인과 장애인,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복지는 한결같이 유지되고 발전합니다. 그게 스웨덴 사회복지의 가장 강력한 힘이죠.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버스도 공짜로 타게 하면서 학생들의 급식은 돈을 받기도 하고. 한국의 사회복지는 여기저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적용하기도 했지만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한국이 스웨덴과 같은 사회복지를 할 수 없는 구조임을 인정한다. 한국은 스웨덴에 비해 ‘너무 큰 나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의 사회복지가 좀 더 일관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집권자에 따라 발전할 수는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안된다는 지적이다.

윤영희 씨의 세 자녀들의 어릴 적 모습. 사진 왼쪽부터 딸 은혜, 큰 아들 남기, 막내 아들 인기. (사진 = 윤영희 제공) 윤영희 씨의 세 자녀들의 어릴 적 모습. 사진 왼쪽부터 딸 은혜, 큰 아들 남기, 막내 아들 인기. (사진 = 윤영희 제공)

지난 35년 간 한국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대학 시절 친구들은 윤영희 씨에게 “너 독재국가에서 왔지?”라고 물어보기 일쑤였다. 인도나 태국, 필리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잘 알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윤영희 씨 주변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삼성과 LG와 현대 기아차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심지어 한국을 스웨덴과 비교해 ‘큰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은 한국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윤영희 씨가 생각하는 ‘한국의 괴로움’은 교육이다.

“처음 스톡홀름 대학교에 왔을 때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어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말고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죠. 지금도 그래요. 스웨덴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요. 믈론 공부가 하고 싶은 애들은 공부를 하죠. 공부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은 아이들은 그걸 해요. 스웨덴의 아이들이 너무 공부를 안해서 바보가 돼 간다고요? 공부를 안하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인가요?”

윤영희 씨의 질문은 답이다. 그의 질문에는 큰 울림과 함께 정답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래서 그녀는 35년 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인생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들이 사는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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