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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스웨덴에 살다-1] 28년 한국의 엄마가 만들어낸 스웨덴 속 대한민국


입력 2017.09.10 05:00 수정 2017.09.15 16:20        데스크 (desk@dailian.co.kr)

이민 2세대 조영숙 씨, ‘착한’ 스웨덴 남편만 보고 시작한 이방인의 삶

공짜로 얻어지는 천국 아닌 노력에 대한 정당한 혜택의 나라

외교부의 2015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2789명. 이는 영국 4만 263명, 독일 3만 9047명, 프랑스 1만 5000명, 이탈리아 4148명, 스페인 3708명에 이어 유럽 전체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고려인의 숫자가 많은 러시아나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국가는 제외. 외교부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이들 중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비율은 스웨덴이 가장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스웨덴 이민 만 28년을 넘긴 조영숙 씨. 그녀는 지금 스웨덴으로의 이민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좌표가 되고 있다.ⓒ(사진 = 이석원) 스웨덴 이민 만 28년을 넘긴 조영숙 씨. 그녀는 지금 스웨덴으로의 이민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좌표가 되고 있다.ⓒ(사진 = 이석원)

“암 수술에 들어가기 전 토마스가 간호사들에게 ‘내가 돈이 많이 드는 환자다’라고 해요. 자기의 병 때문에 국가의 세금을 너무 많이 쓴다는 거예요. 토마스의 이야기를 이해한 나는 화가 났죠. 18살부터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낸 세금이 얼마인데, 3년간의 암 치료를 위해 자신에게 들어간 국가의 세금을 걱정한다니. 하지만 간호사들은 토마스를 보면서 숙연해졌어요. 자기가 낸 세금이기에 그저 당연한 혜택이라고 생각했지 토마스처럼 생각하지는 못했다는 거죠.”

스웨덴 땅에서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였고, 친구였으며, 그래서 전부였던 남편 토마스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게 꼭 12년 전. 그리고 그것은 영숙 훠게르휘엘(Young-Sook Fagerfjäll. 이하는 한국 이름 조영숙) 씨가 세상에서 가장 낯선 땅을 밟은 지 16년이 되던 때다. 스웨덴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착했던 남편 토마스 훠게르휘엘(Thomas Fagerfjäll)은 자신 하나만을 보고 스웨덴에 온 조영숙 씨와 딸 미나(Mina)를 남겨놓고 2005년 9월 세상을 떴다.

조영숙 씨는 1989년 9월 7일 스웨덴에 왔다. 지난 7일은 그녀가 스웨덴에 도착한 지 꼭 28년이 되는 날이다. 조영숙 씨가 말도 통하지 않는 파란 눈의 스웨덴 남자 토마스와 결혼하게 된 것은 ‘농담’ 같은 운명이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난 어린 시절의 친구. 스웨덴에 있는 줄 알았던 친구가 동대문 부근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고, 그리고 조영숙 씨는 마치 마법에 홀린 듯 그 친구의 권유로 프랑스도 영국도 독일도 아닌 스웨덴 여행을 한다.

거기서 케니 로저스를 닮은 파란 눈의 토마스를 만났다. 보트를 즐기며 몸과 영혼 모두가 자유로웠던 토마스는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에서 프리랜서 사진 기자로 일했지만, 무언가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유롭게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한 남자였다.

“토마스 하나를 바라보고 스웨덴에 왔지만 스웨덴어도, 영어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여기서 사는 게 맞나?’하는 생각에 몇 번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한국인도 거의 없었고, 스웨덴 사람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아마 딸 미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토마스가 나를 사랑한다 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거예요.”

1989년 9월 7일 스웨덴으로 건너간 조영숙 씨는 이듬해인 1990년 8월 11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 사이에 그녀는 몇 번의 짐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사진 조영숙 씨 제공) 1989년 9월 7일 스웨덴으로 건너간 조영숙 씨는 이듬해인 1990년 8월 11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 사이에 그녀는 몇 번의 짐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사진 조영숙 씨 제공)

조영숙 씨가 스웨덴에 도착한 무렵은 스웨덴 경제의 호황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시점이다. 2년 후인 1991년 스웨덴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고, 결국 획기적으로 복지를 줄이는 복지 개혁을 단행했다. 조영숙 씨가 SFI(Svenska för Invandrare. 이민자를 위한 스웨덴어 교육)를 하면서 겨우 스웨덴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던 스웨덴 복지를 완성한 사회민주당은 실권했고, 복지 정책은 대규모의 수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영숙 씨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자신이 즐기던 ‘자유’마저 던져버리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애쓰던 남편은 그녀의 옆에 오래 있지 못했다. 결국 14살짜리 딸을 데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낯설었던 스웨덴에서 조영숙 씨는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었다.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 복지를 1991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한 스웨덴이었기에 그녀의 삶도 이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미성년자인 딸에게 지급되던 수당,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지급되는 연금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홀로 딸을 키우며 사는 여성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지팡이 같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딸은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험난했고, 고통도 없지 않았지만 조영숙 씨는 지난 해 12월부터 ‘스웨덴 사람들이 일을 하며 사는 이유’라는 정년 퇴직자, 즉 노후 연금을 수령하는 펜훈내르(Pensionär)가 된 것이다.

“요즘 스웨덴으로 오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가장 행복한 이민자’라는 말을 해요. 2006년 다시 사민당이 실권하고 보수 연정이 집권하면서 특히 이민자들에 대한 복지가 많이 줄어들긴 했죠. 환율도 높아졌고. 그러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데, 그러나 우리 시대에 스웨덴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특히 언어의 장벽 앞에서 고통을 받았고,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한없이 낮은데서 오는 소외감도 엄청났죠.”

조영숙 씨 말처럼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스웨덴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감 제로’였다. 한국은 그저 ‘입양아가 비싼 나라’와 ‘겨우 군사 독재에서 벗어난 개도국’ 정도의 나라였다. 국격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민자들의 처지는 지금 우리 땅에 있는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출신 외국인들의 처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영숙 씨 세대들은 스웨덴 사회에서 꾸준히 한국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해낸 일보다 더 중요했다. 스웨덴 사람들과 그다지 상관없는 대한민국 정부나 대사관이 아닌, 스웨덴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고, 관계하고, 호흡했던 그들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각인 시켰다. 홀로 딸을 키우며 산, 그 딸이 스웨덴 사회의 명확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만든 한국의 엄마들이 딸에게 쏟을 수 있었던 헌신과 애정, 그리고 희생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준 표본이 된 것이다.

한국식으로 딸의 돌잔치를 치른 조영숙 씨 가족. 딸 미나와 남편 토마스와 가장 행복했을 순간이다. ⓒ(사진 조영숙 씨 제공) 한국식으로 딸의 돌잔치를 치른 조영숙 씨 가족. 딸 미나와 남편 토마스와 가장 행복했을 순간이다. ⓒ(사진 조영숙 씨 제공)

지난 28년을 되돌아보는 조영숙 씨는 회한도 없지 않다. 사랑하는 남편이 그렇게 일찍 떠날 줄 알았다면 아예 그런 고통의 시작도 만들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도 한다. 낯선 이방인으로 살면서 무섭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또 밉기도 하면서 28년 전 그 선택을 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딸이 있었고, 그 딸이 아름답게 자라줬고, 그래서 한국인 엄마의 자랑스러움을 간직해줬기 때문에 후회와 원망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행복함이 더 크다.

“스웨덴 사람들은 순수해요. 인종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죠. 그리고 그들의 정직함과 투명함은 사람이나 정부나 기업이나, 그들 모두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게 해요. 요즘 한국에서 주재원이든, 유학이든, 취업으로 오는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못 느끼죠. 한국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한국이 충분히 성장하는 동안 우리들은 스웨덴 속의 한국을 또 그렇게 성장시켰죠. 그게 우리들의 자부심이랍니다.”

이민 28년, 조영숙 씨는 한국 사람들에게 스웨덴은 공짜로 행복이 얻어지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민 선배들이 외로움과 고통을 이기며 만들어낸,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격이 완성해낸, 그래서 성실한 노력이 정당한 혜택을 가능하게 하는 ‘부단한 노력의 파라다이스’라고 얘기해 주고 있다.

[필자 이석원 소개]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 이주를 단행했다. 스웨덴 이주를 단행하기 전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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