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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께... ‘응징방안’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요?


입력 2017.09.04 06:06 수정 2017.10.16 09:50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나약한 대응은 공포와의 타협 비굴의 끝은 노예

핵실험 완성단계의 도발을 두고 아직도 지켜보겠다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3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관련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제사회와 함께 최고의 강한 대북 응징" 을 지시했다고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3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관련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제사회와 함께 최고의 강한 대북 응징" 을 지시했다고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국제사회와 함께 최고로 강한 응징방안을 강구하라.”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관련해 그같이 지시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전언이다. 우리가 북한을 응징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 수 있을까? 문 대통령, 그의 참모들과 군당국자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물으려 한다. “그게 무엇입니까?”

북한은 3일 낮 12시에 수소탄 실험을 했다고, 그 3시간 반 후에 발표했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수소탄 시험에 ‘완전히 성공’했다는 주장이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십 수년간 “한 발짝만 더 와봐, 가만두나!”하며 밀리고 또 밀린 결과다.

북한의 기세등등한 수폭 위협

우리의 경우 언제나 정색을 하고 경고한 것도 아니었다. ‘햇볕정책’이니 ‘평화번영정책’이니 해가며 헤실헤실 웃기도 하고, 달러도 바치면서 얼마나 비위맞추려 안간힘을 썼던가. 그런데 그에 대한 북한의 응답이 ‘ICBM장착 수소탄 시험 성공’이었다. 우리 안의 평화주의자들에겐 아직도 북한을 설득할 길이 남아 있을까?

이제 더 밀릴 곳이 없다. 북한도 더 밀어붙일 필요가 없어졌다. 북한은 군사적 위협수단의 최종적 결과물을 보란 듯이 내놨고, 우리는 눈 멀거니 뜨고 북한 TV방송 아나운서의 발표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대통령이 ‘응징’을 말했다는데 그런 게 우리에게 있을 턱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있다면 제발이지 국민도 좀 알게 해 주시라.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 후 1시간 30분, 지진파 감지 후로도 1시간이 지난 후에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열었다. 대통령의 지시와 회의내용이 발표된 것은 북한이 핵실험사실을 기고만장해서 발표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이런 굼뜬 안보사령탑의 북한핵 대처자세를 믿고 가슴을 쓸어내려도 될지 회의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주문을 했다.

“북한 핵·미사일 개발 고도화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국민생명과 국가안보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히 지켜야 한다.”

“북한 핵·미사일 계획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으로 포기하고 고립시킬 유엔 안보리 결의 추진 등 모든 외교적 방법을 강구하라.”

“한미동맹 차원의 연합방위태세를 토대로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추가도발에 만전을 기하라.”

그런데 이런 지시는 사후약방문격이 된지 오래다. 자신이 속했던 정파 혹은 이념집단이 과거 정권을 잡았을 때, 그 후 자신이 야당을 이끌었을 때, 바로 지금과 같은 각오로 국가안보 강화에 앞장섰어야 했다. (한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개발 고도화를) 용납하고 말고 할 차원은 진작 넘어서 버렸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유감스럽게도 청와대는 여전히 느긋해 보인다. “추가도발에 만전을 기하라”는 것은 이번 핵실험에 대해서까지도 ‘경고’ 정도로 대응하겠다는 뜻 같이 들린다. 또 “지켜 보겠다”는 것인가?

언론이 ‘청와대 고위관계자’라고 지칭한 어떤 인사는 “레드라인이라는 것이 핵과 ICBM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한의 발표 내용을 봐도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에 ‘완전성공’했다는데도, 우리의 이해심 많은 이 고위관계자는 그게 아닐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레드라인을 넘어서고서야 대응하겠다는 것인가? 그 땐 이미 ‘상황 끝’이다. 그런데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듯이 말하다니!

레드라인 넘은 게 아니라고?

아마 북한은 앞으로 핵실험‧미사일 발사 같은 게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도발을 시도할 것이다. 미국과 핵보유국끼리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논의하자거니, 핵군축협상을 시작하자거니 하면서 대미 압박을 강화할 개연성이 높다. 대한민국은 낭중지물(囊中之物)이 된 것으로 치부하고!

김 씨 왕조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은 누구나 알았다. 기어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 이를 것임을 예감치 못한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으리라 확언할 수 있다. 그런데 헛된 기대를 건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한 말이다. 그 ‘민족’이라는 집단의 정체를 우리는 새삼 확인하고 있다.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민족이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게 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에 가서까지 북한의 핵개발은 자위적 수단이라고 변호해줬다. 외국 정상들과 50회가 넘는 회담을 하면서 북한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고도 했다. 그가 직접 김정일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하면 ‘민족공조’가 정말 이뤄지고 남북한의 동포들이 얼싸안고 평화와 행복의 세월을 같이 누릴 수 있으리라고 그는 정말 믿었던 것일까?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강조한 말이다. 그 대상이 아무래도 북한이 아니라 미국인 듯하다. 그러니까 ‘대미 경고성 부전(不戰) 선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문제를 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논의하기로 한 듯한 분위기는 또 그렇다 치고 북한이 듣기에는 어땠을까?

유감스럽게도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에 대해 동의를 받으라고 우리가 강제할 수 있는 나라는, 적어도 우리 주변에는 없다. 북한이 우리의 동의를 구한다? 소가 웃을 일이다. 미국 또한 우리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할 힘과 수단을 가졌다. 더 큰 문제는, 한미동맹 말고 북한핵에 맞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미국에 대한 경고로 들릴 수 있는 선언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했다. 지금까지 강력한 방벽역할을 해줬던 미국인들이 이 말을 듣는 기분은 어땠을까?

북한의 전체주의적 유사 신정체제의 광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냥 광기이면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다. 광기의 외피 안에는 잔혹한 계산이 들어 있다. 오직 왕조와 김정은 자신의 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인류적 범죄도 불사하겠다는 게 그 자신과 그의 충실하고 맹목적인 부하들이 가진 자제될 수 없는 욕망이다.

유약한 평화주의가 화 부른다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무모한 짓을 벌일 리는 없다. 대신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으려 할 게 뻔하다. 그러자면 적어도 한국은 자기들의 인질이나 방패 노릇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수소탄을 장착한 ICBM으로 위협 받게 될 때 미국이 본토의 대량살상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한국의 전쟁을 도맡아 치러주려 하겠는가? 천만에! 서로의 안전이 보장되는 선에서 타협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더 높다. 조건만 맞는다면!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힘의 논리다. 평화와 자유는 자신을 던져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몫이었다. 전쟁할 각오가 없이, 자신을 던질 희생정신이 없이 지켜진 사회나 국가는 일찍이 없었다. 비굴의 끝은 노예의 삶이거나 죽음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단호한 결의로 공동작전을 펴기만 했다면 미국의 도움 없이도, 1933년부터 34년의 시점에서 히틀러를 막을 수 있었다.”(폴 존슨, 세계현대사, 이희구‧배상준 역)
그러나 당시 영국의 정치리더들은 유약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해서도 약해지라는 압력을 가했다.

“히틀러의 ‘전권위임법’(혹은 히틀러 수권법)이 독일 의회를 통과한 날 오후 영국 의회에서는 앤서니 이든이 프랑스 육군병력을 69만 4000명에서 40만 명으로 감축시킬 것을 정부정책으로 발표하며 ‘지금 유럽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유화시대를 보장하기’ 위한 방책인데 이를 반대하다니 무슨 말이냐고 처칠을 비난했다.”(위의 책)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박애·평화주의자들이 기세를 올렸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들을 가리켜 ‘선(善)의 군단’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D. H. 로렌스는 격한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외관상 평화와 선을 가장하고 자신의 혼이 각각 작은 신이 되려고 한다. 이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작은 윤리적 절대자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정말이지 듣기 역겹다. 기생충 같은 놈들이다.”(위의 책)

영국과 프랑스의 나약한 대응은 박애주의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와의 비겁한 타협이었을 뿐이다. 호전적 집단이, 밀면 밀리는 상대, 호통 치면 주저앉는 상대와 평화공존을 하려 할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대학살은 악마 앞에서 떨 줄만 알았던 비겁하고 나약한 박애·평화주의자들이 불러들인 참화였다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소용에 닿지 않는 교훈일까?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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