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스페인의 쇠락의 길을 미국이 걸어가고 있는 이유


입력 2017.09.03 07:53 수정 2017.09.10 07:26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제국의 비극적 결말②>

강한 믿음과 확신은 성공 이끌지만 몰락의 원인도 돼

스페인의 황제 펠리페 2세.ⓒmoviespictures.org 스페인의 황제 펠리페 2세.ⓒmoviespictures.org
저번 글에 이어지는 글이다.

펠리페 2세는 온 세상이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통치자 또 하나의 칼로 다스려지는 태평성대를 열게 될 것이란 부푼 기대를 받으며 방대한 스페인 제국의 제위에 올랐으니 때는 1554년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통치자, 하나의 칼은 펠리페 2세가 제위에 오르던 그 시점에서 이미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하나의 믿음이란 이른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교리였다. 펠리페 2세가 제위에 오르기 전인 1517년 루터와 칼빈, 츠빙글리와 같은 종교 개혁가들로부터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북유럽을 중심으로 맹렬히 번져가고 있었다. 이미 하나의 믿음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칼 즉 하나의 공권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중해와 동유럽 쪽에선 이슬람의 막강한 오스만 제국이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유럽을 침공해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년 전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한 프랑스와 역시 백년전쟁의 패배로부터 다시 일어선 잉글랜드가 호시탐탐 스페인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여기에 스페인 제국 내부를 들여다 볼 것 같으면 두 개의 큰 세력, 즉 내륙의 무인(武人) 기질을 지닌 카스티야 세력과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적 해양문화의 아라곤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줄여 말하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대립이 그것이니 이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물론 스페인 제국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해마다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호송선단의 보호 아래 제국으로 유입되어 마르지 않는 화수분 역할을 해주었다. 거기에 더불어 당시 유럽 최강의 전사 집단인 테르시오(Tercio) 군단이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모습을 오늘날 글로벌 제국 미국에 견주어보면 나름 충분히 흥미가 있다.

오늘날 미국은 ‘유에스 달러’라고 하는 사실상의 세계통화를 재량껏 발행할 수 있어 외국으로부터 얼마든지 물자와 용역을 수입해 쓸 수 있으니 스페인 제국의 금과 은이나 진배없다고 하겠다.

또 미국은 11척의 공격 항공모함과 거의 항공모함에 준하는 11척의 강습함, 51척의 공격용 잠수함, 65척의 이지스 구축함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으며, 지상의 경우 전 세계 어디가 되었든 하늘을 통해 불과 수일 이내에 막강한 화력을 전개할 수 있는 82 공수사단과 101 공수사단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여기에 전략 핵 타격 능력 또한 러시아나 중국 등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오늘날 ‘달러’라는 도깨비 황금 방망이와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글로벌 제국 미국이니 이는 1500년대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을 바탕으로 최강의 전투력을 구비했던 스페인 제국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스페인 제국의 경우 제 아무리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막대한 금과 은이 들어왔어도 제국이 지켜야 하는 전선(frontline)은 너무나도 여러 지역에 걸쳐 있었고 또 다양했다.

잉글랜드 해적들은 아메리카와 스페인 사이를 오가는 스페인의 화물선과 보물선을 호시탐탐 노렸으니 그를 지켜야 했음은 물론이고 지중해와 아프리카 북안에선 오스만의 해군이 늘 침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왕성한 독일 지역은 물론이고 플랑드르(오늘날의 네덜란드) 개신교 세력들이 제국과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으며, 프랑스 또한 스페인 제국의 영역인 이탈리아를 끊임없이 넘보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천지사방이 온통 전선(戰線)이고 전쟁터였던 스페인 제국이었다.

사실 네덜란드는 상업경제가 왕성하여 놓칠 수 없는 세수(稅收)의 원천이었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하는 불온한 사상에 물들어 황제의 골머리를 썩혔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또한 말이 된다. 남쪽 이탈리아와 지중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스만과의 전쟁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너무나 먼 나라의 얘기에 지나지 않았건만 황제는 전비(戰費) 마련을 위해 끊임없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내라고 졸라 대었으니 불만이 생길 법도 했다.

"가까운 당사자들 보고 내라 해, 왜 우리가 먼 나라의 전쟁에 돈을 내어야 하냐고?"하는 불만과 더불어 이단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들끓기 시작했던 네덜란드였던 것이다.

황제로선 제국 전체를 생각해야 했지만 문화와 법, 관습이 다른 각 지역들은 자기 지역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게다가 황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과의 직접적 영적 영적(靈的) 만남을 추구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이는 펠리페 2세의 말로서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로 여기고 로마 가톨릭을 통한 제국의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었음을 잘 알게 해주는 말이다.

이에 황제는 스페인 내부에 머물던 이슬람 사람들을 모두 추방해버렸고 유대인들을 탄압했으며 유럽 각지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박멸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1568년 네덜란드 지역에서 일대 반란이 일어났다. 교리의 문제와 더불어 상호간의 이해부족과 불신이 쌓인 결과였고 최종적으론 펠리페 2세의 강경책이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국으로선 부강한 네덜란드 지역을 그냥 잃을 순 없었기에 진압 병력을 파견했고, 이에 기회를 엿보던 영국이 네덜란드 편을 들고 나섰다. 이로서 무려 근 80년에 걸친 전쟁 즉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지중해 쪽에선 1581년 오스만의 해군을 무찌르는 대첩, 즉 레판토 해전에서의 승리로 한 숨 돌릴 수 있었으나 전쟁비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무한정 늘어만 갔다.

아메리카의 금과 은은 실로 막대한 양이었지만 그것으론 어림도 없었고 각 지역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했지만 결국 부족했다. 이에 황제는 금융가들로부터 고리의 대출을 받았고 또 때론 부도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지중해 쪽의 문제가 그나마 안정되자 악의 근원인 잉글랜드를 확실하게 처리하기로 결심을 했다. 바로 저 유명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동이 그것이었다, Armada Invencible. 1588년의 일이었다.

제국의 모든 군함과 병력을 총집결시킨 무적함대의 출동은 펠리페 2세로선 사실상의 승부수였고 ‘올인’이었다.

대서양 항로를 괴롭히던 영국 해적들을 소탕함은 물론이고 네덜란드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아예 잉글랜드 섬을 침공하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 영국 해군의 견제로 네덜란드에서 대기하던 육상 병력을 실을 수 없었고 또 도중에 풍랑을 만나 많은 배를 잃고 초라하게 돌아와야 했던 무적함대였다.

무적함대의 실패는 황제의 기를 철저하게 꺾어 놓았다. 어려운 와중에도 모든 재정적 여력을 죄다 끌어 모아 시도했던 건곤일척의 승부수가 실패했으니 말이다.

황제의 나이 61세의 일이었다. 27세의 나이에 황제가 되어 성심껏 하느님의 소명(召命)을 받들어 평화로운 제국을 만들고 지켜내겠다던 펠리페 2세였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

무적함대의 패배를 계기로 황제는 자신이 제위에 오르자 직접 설계하고 관여했던 마드리드 서북쪽의 ‘엘 에스코리알’ 궁전 겸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황제는 그곳에서 일체 외부 출입을 하지 않았고, 검은 수도사 복장을 한 채 기도와 묵상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10년 뒤인 1598년 세상을 떴다.

그 이후 스페인 제국은 끊임없이 쇠락(衰落)의 길을 걸었다. 바다의 패권은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내어주었고 지상에선 프랑스에게 밀려 2류 국가가 되고 유럽의 변두리 국가로 전락해갔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패배는 한때 해가 지지 않던 스페인 제국의 사망을 확인한 일종의 에피소드에 불과했으니 이는 1598년 펠리페 2세의 사후 300년 만의 일이었다.

강한 믿음과 확신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몰락으로 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펠리페 2세의 삶은 말해주고 있다. 비극의 원인은 성공에 있다는 묘한 역설(逆說).

마지막으로 펠리페 2세의 운 흐름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1527년 5월 31일 15:20분에 출생,
사주는 정해(丁亥)년 을사(乙巳)월 무진(戊辰)일 경신(庚申)시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60년 운세 순환을 알아보면 1568 무진년이 운기의 절정인 입추(立秋)였고 1538, 1598 무술년이 입춘(立春) 운세 바닥이 됨.

주요 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56년 제위(帝位)에 올랐으니 운세가 이제 힘찬 상승세로 오를 무렵이었다. 1561년 마드리드로 천도한 것은 펠리페 2세가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을 가질 때였다.
1571년 기세가 한창일 때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했다.
1588년 이제 물러가야 할 때에 무적함대가 패배했고 그로서 사실상 은퇴했다.
1598년 운세 바닥에 이르러 사망했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www.hohodang.com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