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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제국도 그 끝은 비참했다


입력 2017.08.27 06:43 수정 2017.08.27 07:15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제국의 비극적 결말①>

스페인 제국의 선량한 황제 펠리페 2세의 시작과 끝

“잘 들으시오, 결정하기 애매한 경우에는 항상 짐에게 불리한 쪽으로 결정되도록 하시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서양의 어느 선량한 황제가 자신의 직접적 이해가 얽혀있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어려운 판결을 내려야 했던 심판관들에게 했던 말이다.

황제가 직접 저런 말을 할 정도면 그 황제는 분명 어질고 훌륭한 황제임이 분명하다. 황제는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 부친으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 나라에선 예로부터 ‘법이 정의롭지 않다면 왕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있어왔다. 이에 황제는 개인의 일은 물론이고 나랏일과 관련된 모든 판단이나 결정에 있어 늘 궁정 신학자들이나 자문관들로부터 조언을 들어야 했고 또 황제로선 그 조언에 따르는 것이 모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황제는 절대의 권력자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神)의 대리인 자격으로서 인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황제는 신의 에이전트(agent)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개념은 동아시아 세계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고대로부터 중국에선 황제를 천자(天子)라 불렀는데, 이는 서양의 신(神)이란 용어 대신에 천(天)이라 했을 뿐이다. 중국에서 천(天)은 달리 산천(上天) 혹은 상제(上帝)라 불렀다.

따라서 중국에서 황제는 천(天)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자 즉 천명(天命)을 받은 자였고 서양에선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였으니 결국은 같은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 동서양의 황제들이 자기 독단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건 오히려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신(神)이나 천(天)의 감시 감독을 받아야 하는 권한 대행인 즉 에이전트로 여겼기에 무척이나 언행에 신중을 기했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왕들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늘 행동이나 판단에 제약이 많았으며 항상 견제를 받아야 했다.

서양의 경우 궁정의 신학자들과 기타 자문역들이 늘 황제에게 이런저런 자문과 권고 또는 충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었고, 중국의 황제나 우리나라의 왕들 또한 유교(儒敎)에 정통한 신하들이나 간관(諫官)들로부터 무수한 참견을 받아야 했다.

참고로 간관(諫官)이란 간언(諫言) 즉 매사 왕의 일에 시비(是非)를 따지면서 잔소리를 해대는 관직이다. 그런 잔소리꾼들을 정식 관리로 채용하고 늘 참견을 받아야 했으니 왕노릇 해먹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음 편하게 황제나 왕을 해먹은 자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 대통령 임기가 정해져있으니 사실상 ‘바지사장’인 셈이고, 늘 여론의 동향은 물론이고 언론의 비판과 야당으로부터의 견제에 시달려야 한다.

역사적으로 문명권에 속한 나라들 중에 ‘진짜배기’ 독재 권력을 휘둘렀던 통치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경우 아프리카 후진국의 독재자들이나 북한의 김정은 정도가 진정한 독재자라 하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예로 든 서양의 황제 즉 신앙심 깊고 조정대신들과 신학자들의 자문에 따르는 것을 의무처럼 여기면서 인민들에게 성실하게 봉사하고자 했던 착하고 선량한 서양의 황제는 누구였던 것일까?

그 사람은 1500년경 거대하기 이를 데 없이 드넓은 스페인 제국을 다스렸던 ‘펠리페 2세’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스페인 제국은 참으로 방대했다.

스페인 본국은 물론이고 인근의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와 같은 지중해 여러 섬들,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벨기에와 네델란드, 여기에 남북 아메리카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 인도 해안의 무수한 항구들, 태평양의 필리핀 등지에 걸쳐 무수히 많은 식민지와 거점을 영토로 하고 있었다.(참고로 얘기하면 오늘날의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가 된 이후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국호가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대영제국을 일컫는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바로 이 스페인 제국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영어론 ‘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이지만 원문은 스페인어로서 ‘el imperio en el que nunca se pone el sol’이 되시겠다. 이 말은 펠리페 2세의 부친이었던 카를 5세의 재위 시절 어떤 신하가 아부 차원에서 만들어 바친 말이었던 것이다.

아부조의 말이긴 했지만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제국의 어느 곳에선 반드시 해가 하늘에 떠있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버지 카를 5세로부터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그야말로 자신의 일에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진정성 넘치는 황제였던 것이다.

펠리페 2세가 제위에 오른 것은 27세 무렵인 1554년이었다. 당시 그가 제위에 오르자 스페인의 어느 시인은 ‘한 분의 군주와 하나의 제국, 하나의 칼’만이 존재하는 질서와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찬했다.

기독교 신앙에 충실했던 그 시인은 장차 펠리페 2세의 시대를 한 명의 목자(牧者)가 하나의 지팡이를 들고 한 무리의 양떼를 돌보는 시대, 즉 예수님을 대리하여 펠리페 2세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시대에 비유했던 것이다.

온 세상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와 하나의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통합된 나라가 되었으면 소망이 오래 전부터 유럽인들 사이에 있어왔으니 이를 유럽인들은 ‘Dominium Mundi’라 했다.

영어로는 ‘universal monarchy’라 했으며 또 그런 제국을 ‘universal empire’라 불렀다. 우리말로는 일반적으로 ‘ 보편제국’이라 번역되고 있다. 이에 오늘날의 유럽연합(EU) 역시 바로 ‘보편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된다.

과거 로마제국과 그 뒤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동경이었던 것이니 온 세상이 하나의 나라가 되면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유럽인들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보편제국은 여전히 이상이고 꿈으로 남아있다. 펠리페 2세가 다스리던 스페인 제국, 즉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또한 그를 위협해오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로부터도 그러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이다.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던 것일까에 대해 나 호호당의 안내를 받아가며 따라가 보자. (싫으신 분은 안 따라오셔도 된다. 물론이다.)

제국의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사실 무수히 많았다. 거대한 제국의 모든 영역들이 하나의 가치체계와 신앙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이라 해도 내용은 저마다 달랐다. 지역마다 고유의 관습법과 법령들이 달랐으며 부과되는 세금 또한 달랐다.

스페인 자체만을 봐도 그러했다. 오늘날 우리는 스페인을 하나의 나라로 여기지만 사실 수십 개의 나라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바람에 스페인엔 무려 17개의 자치지구 밑에 50개의 주가 있는데 사실 각각의 주는 과거에 하나의 독립된 왕국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려 50개의 나라가 스페인이란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때론 싸우고 때론 협력하면서 유지해가는 나라로서의 스페인이다. 그렇기에 과거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은 사실 또 다시 수십 개의 나라들이 이념과 이해관계에 얽혀 싸운 역사였으며 그렇기에 프랑코 독재 정권의 무지막지한 강압 없이는 해결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치고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모르는 자는 없다.

두 팀은 엄청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과거 스페인 안의 양대 왕국이었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경쟁의식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카스티야, FC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을 대표하고 있어 두 라이벌 팀의 시합은 사실상 축구를 빙자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 봐도 무방하다. 치열한 이유가 있다.

오늘 글은 이 정도에서 끊고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한다. 환절기라 그런지 평소 생각만 하지 정작 블로그 글로는 쓰지 않던 내용을 이렇게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글을 반기는 독자도 없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힘을 내어보기로 했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www.hohodang.com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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