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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이재용의 어제와 '피고' 이재용의 내일


입력 2017.08.26 16:06 수정 2017.10.16 10:06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그 어떤 사명감으로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양이 되길 요구하며 늑대 본성 없다고 비판 받은 세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 공여 등 혐의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데일리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 공여 등 혐의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데일리안

벌써 30년전 일이다. 대학 첫 등교 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 친구가 이병철 손자래”(그때 만해도 이건희보다는 이병철이 더 유명했다.)
“잘 생겼다. 그런데 공부도 잘했네, 돈도 최고로 많고,.. 게다가 승마선수 출신이라네.”
“그럼 체육특기자로 들어 온 거야?”
“서울대에 무슨 체육특기자냐. 승마는 그냥 취미로 했다나봐”

“그런데 왜 사학과야?”
“할아버지(이병철)가 기업 오너는 크고 길게 봐야하기 때문에 경영보다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목된 친구를 보니 정말 훤하게 잘생기고, 웃음 착해 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게 이재용이었다.

대학시절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1학년 1학기 때는 ‘6월 항쟁’ 기간이었기 때문에 동맹휴업이 잦았다. 그만큼 자주 함께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호기심이 강했다. 많은 친구, 선배에게 민주화운동의 상황을 물었고,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운동권 선배들도 그를 배척하지 못했다. 어떤 운동권 선배는 등록금을 빌리기도 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면 등록금은 충분히 조달할 수 있는 때였다. 적대감이나 거부감이 있었다면 그런 대안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루는 걸어서 교문쪽으로 나가는데, 재용이가 손에 과자를 들고 거꾸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좌석버스를 타러 간다고 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교문까지 나와 버스를 탔다. 그런데 학교 안까지 들어오는 좌석버스를 타고 하교를 한다는 것이었다. 손에는 그 당시 가장 비싸다는 쿠키가 들려 있었다. ‘버터링 쿠키’였다. 당시는 얼마 전 화제가 된 ‘하니 버터’보다 더 핫한 과자였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두고두고 생각이 남았다. 그 상황 자체가 묘한 ‘이율배반’이었다. 좌석버스와 버터링 쿠키는 일반 학생으로는 조금 호사스러운 아이템이었지만, 대한민국 최고 부자에게는 ‘서민적’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과외 아르바이트로 많은 돈을 벌었고, 마음만 먹으면(술값으로 탕진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수준의 ‘사치’였다.

체육수업 시간도 기억이 난다. 1학년때는 모두가 함께 듣는 수업이 많았다. 체육수업으로 테니스를 배웠다. 대부분 촌놈들이라 처음 배우는데,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있었다. 역시 재용이었다. 빼어난 실력으로 강사를 압도했다. 강사도 나중에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을 정도다. 많은 동기들은 그로 인해 으쓱했다. 그렇게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졸업하고 동기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그의 동향을 보는 정도였다. 동창회에서 그 친구의 근황은 단골메뉴다. 어디나 그렇듯이 부지런히 정보를 제공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병역문제’, ‘삼성승계문제’ 등이 끊임없이 기사화됐다. 우리끼리 모일 때는 비판적인 얘기도 있었지만 ‘그 친구 정말 피곤하겠다’는 동정론도 많았다. 대학시절의 소탈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2세, 3세 보다 여론은 더 혹독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많은 ‘재벌 2, 3세 일탈기사’의 주인공이 되지도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문을 들었다. 외삼촌인 중앙일보의 홍석현 회장이 멘토 역할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연결시켜 준다는 소문이었다.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 ‘겸손하고, 신중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였다.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면서 간간히 따라 붙는 말이 ”대기업 오너를 하기에는 대가 좀 약해 보이더라“였다. 한마디로 '똘끼'가 너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과 대비되는 모습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양이 되길 요구하면서 늑대의 본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들렸다. 그에 대한 모순된 요구는 감수해야 할 그의 또 다른 운명이었다.

10여년 전에 그가 동기모임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근황을 묻자 “기업하는 사람이 세금 잘 내고, 고용 많이 하면 되는 거잖아”라는 예의 그 선한 웃음을 보였다. 그 때도 편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정은 언제나처럼 밝았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번 재판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재판 판결 후 언론에 실린 사진이 그동안의 변화된 상황과 지금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재판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이재용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그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지만 주변의 요구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나름 엄격했지만, 돌아온 것은 ‘똘끼’ 충만한 재벌 2, 3세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1등 기업 오너로 말발이 서려면 별을 쎄게 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사회적 책임이라고 강요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헬 조선’을 이야기하며 대한민국을 떠나고 있고 떠나려 한다. 이재용은 어떤 심정일까? 분명한 것이 작년 이전의 이재용과 지금 이후의 이재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조국에 대한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바뀔지 걱정이다. 그는 ‘노력했으나, 그 결과는 배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선택은 뻔하지 않을까?

그는 평생 쓰고도 남을, 나아가 몇 대가 쓰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돈이면 세계 어디가나 최고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고와 치욕을 어떤 사명감으로 감당하겠는가? 대한민국 제조업 매출액의 12%를 감당하며 ‘일자리 창출’에 앞장섰고, 법인세의 7%을 담당해 국가재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높여왔던 삼성이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거나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 현실화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글/김우석 미래전략개발연구소 부소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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