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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문서 공개 소동, 우매하거나 영리하거나


입력 2017.07.24 04:30 수정 2017.10.16 09:52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공간 재배치 안했다면 아직도 발견 못했을까

국가경영에 바쁠 청와대가 전정부 치부 찾기에 매진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이 7월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이 7월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옛날 이웃동네 동사(洞舍)지기가 첫새벽 산마루에서 외치던 소리가 새삼스레 귀를 울리는 이즈음이다. ‘산 위의 외침’은 50년대까지 마을 전체 주민 대상의 유일한 대량(?) 통신 수단이었다(산이 없는 마을에서는 집집이 찾아가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작로 부역, 보(洑) 정비 같은 마을 공동과제는 물론이고 회갑연, 결혼식, 초상 등 주민의 애경사(哀慶事)도 이를 통해 전달됐다,

5‧16 이후 마을회관에 확성 장치가 갖춰지고, 각 가정에는 앰프가 보급되면서 동사지기는 더 이상 산에 오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60년쯤이나 지난 지금의 청와대를 통해 다시 듣는 기분이 참으로 묘하다.

도울 수 있으면 돕자는 게 죄?

청와대는 지난 14일 대변인 긴급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정부 당시 민정수석실 문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수현 대변인은 발표 30분 전에 “방송사들은 생중계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시쳇말로 바람을 잡기도 했던 모양이다. 300건에 달하는 문건은 그 11일 전 민정비서관실 공간 재배치 과정에 캐비닛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공간 재배치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그 문건은 지금도 캐비닛 속에 잠자고 있을까?

공개된 문건 가운데 손으로 쓰인 ‘삼성 경영권 승계’ 관련 메모가 있었다.

“경영권 승계 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삼성이 국가 경제에 더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 모색.”

이런 내용이었다는데 “이것이야 말로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가 민간기업의 경영권 승계 기회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증거”,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배경”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삼성전자는 총수가 구속 중인 상황에서도 세계 초일류기업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그런 기업의 경영권 승계문제에 대한민국의 청와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삼성전자의 경영권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악몽일 터이다. 게다가 특정인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 경제에 기여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청와대 관계자들은 ‘인디아나 존스’ 흉내라도 내듯 정무기획비서관실(17일), 정책조정수석실의 기획비서관실, 국가안보실(이상 18일)의 캐비닛에서도 문건들을 무더기로 찾아냈다. 왜 이제야 그 많은 문건들이 발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따지지 않기로 하자. 새 정부의 비서관들은 캐비닛을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고, 종이 없는 사무실로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니까.

상식선에서 판단하자면 수석이든 비서관이든 행정관이든 메모→문서화→공람 및 논의→전자문서화→상급자 결재→대통령 결재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닐까. 또 일단 전자문서화된 것이라도 조직 구성원 간 인식‧의견의 공유를 위해 프린트할 수도 있는 일이고….

전자문서는 진작 국가기록원에 넘겨졌다. 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무슨 음모를 꾸몄더라면 아마 관련 문건들은 그 이전 단계에서 파쇄 또는 소각되었을 게 틀림없다. 남겨 놓고 나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일까. 그 때문에 외부로 유출됐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청와대 비서실의 문건이 비서실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 아닌가.

비서실 문서 비서실에 뒀는데

거듭 상식적으로 추측하자. 박 전 대통령은 어느 날 갑자기 업무정지상태에 빠졌다. 비서실이라고 제대로 가동됐을 리 없다. 장래가 극히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뻔하다. 추이를 지켜보는 게 고작이다. 각자의 개인적인 기록을 정리하고 없애고 할 정도의 정신적 여유도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를 비워줄 준비를 했다면 그 지시를 받아 문건들을 정리했겠지만 이미 지휘부가 궤멸된 상태였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필요 없는 문서들이니까 없애 버렸을 수 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소각이나 파쇄가 위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엉거주춤 놔두고 갔을지 모른다. ‘청와대 비서진들의 조직적 증거인멸 행위’로 몰릴까봐! 또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조직이 와해된 상황이어서 아예 사무실 정리를 포기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으로 추측해 봐도 청와대가 그렇게 요란스레 발표할 정도의 대사건은 아니었다. 단지 말끔히 청소를 하지 않고 나갔을 뿐이다. 하긴 누군가 차기 정부에서 요긴하게 쓰일 문서라고 여겨 일부러 버리지 않고 있다가, 혹은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가 슬그머니 꺼내놨을 가능성도 영 없지는 않다. 역시 있음직 해 보이지는 않지만 현 청와대 비서진 일부가 이미 발견했던 것을 때 맞춰 내놓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이 문건들의 성격이나 남겨진 경위를 몰라서 흥분부터 했다면 이는 청와대 관계자들이 우매했던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건을 들고 나간 게 아니라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나갔는데도 놀라기부터 했다면 똑똑한 청와대라는 평가를 듣기가 어렵겠다는 말이다. 혹 어떤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상황을 그리로 몰아간 것이라면 이는 교활한 수법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전임자들을 궁지에 몰아 아주 압살해 버리겠다는 독한 의도를 가졌다고는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창백한 푸른점』은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저서명으로,『코스모스』(1980년)이후 14년 만에 낸 책이다. 그 4년 전의 발렌타인 데이, 그러니까 2월 14일 NASA(미 항공우주국)는 한 컷의 사진을 보이저 1호로부터 선물 받았다. 파란 점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찍힌 사진이었다. 칼 세이건의 제안에 따라 보이저호가 해왕성을 지나면서 카메라 앵글을 지구 쪽으로 돌려 촬영한 진귀한 선물이었다. 세이건은 그 지구를 ‘창백한 푸른점’으로 명명했다. 동명의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달팽이의 뿔 위에서 뭘 다투나

그런데 동양의 지혜는 그 2천수백년 전에 이미 이를 설파했다.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과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위왕이 이를 깨뜨렸다. 혜왕이 자객을 보내 위왕을 죽일 생각으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갑론을박 결론이 나지 않았다. 혜시(惠施)가 나서서 대진인(戴晉人)이라는 현자에게 물어보시라고 진언했다.
혜왕에게 불려온 대진인은 ‘달팽이의 뿔’ 이야기를 했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촉씨(觸氏)라는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 만씨(蠻氏)라는 나라가 있는데, 양쪽이 영토 분쟁을 일으켜 격하게 싸우는 바람에 전사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한 지 보름 만에야 겨우 싸움이 멎었다고 합니다.”

왕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하자 대진인은 우주를 들어 설명을 이어갔다.

끝이 없는 우주의 무한한 공간을 상정할 때 위나라 제나라 따위는 있을까 말까 한 아주 작은 존재다. 이 양 측이 싸우는 게 달팽이 뿔 위의 전쟁이나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이 말을 듣자 위왕은 전쟁할 마음을 접었다. 장자(莊子) 칙양(則陽)편에 나오는 우화다. 힘자랑밖에 모르는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훗날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칠언절구 ‘대주(對酒)’에 이 고사를 녹여 담았다.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달팽이 뿔 같이 좁은 곳에서 무엇을 다투고 있나.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처럼 짧고 짧은 나의 생애라. 부하든 가난하든 기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입 벌려 웃을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천치지.(김달진 역)


문재인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로 박 전 대통령도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가졌었다고 지금도 믿는다. 대통령을 보필하고 있는 청와대 인사들 또한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현 정부, 지난 정부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범법여부의 판단은 사법부가 할 일이다. 국가를 경영하기에도 바쁠 청와대가 지난 정부의 과오를 밝혀내기에 너무 힘을 빼는 것 같아 보기에 딱하다.

이것도 혁명의 한 과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혁명은 또 다른 혁명을 예비한다는 것을 인류사는 입증해 왔다. ‘적폐청산’을 기어이 하겠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다만 사람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한을 남기는 일은 자제하는 게 옳다.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게 정치다. 노 대통령을 몰아낸다고 정권이 한나라당에 오지는 않는다. 여러분은 백전백패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밤을 세워서라도 청와대와 협상하시라.”

2004년 3월 11일 저녁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열렸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 관련 토론회에서 필자는 그렇게 역설했다. 그러나 이튿날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한나라당은 와해직전까지 갔다가 천막당사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민주당은 거의 멸문 지경에 이르렀다. 불과 13년여 전의 일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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