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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데는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입력 2017.05.08 04:23 수정 2017.10.16 09:57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파당적 욕심이 과한 대통령, 국민을 고통으로

대중선동, 폭력적 정치세력 결성, 포퓰리즘 등 경계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할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공식 선거운동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고 있다. 대선을 코앞에 둔 7일 큰 산불로 피해를 입은 강원도 강릉 성산면 관음2리 버스정류장에 대선후보들의 선거벽보가 부착돼 있다. 기다림의 장소이자 새로운 출발의 장소이기도 한 길가의 정류장에서 대선을 하루 앞둔 그리고 어버이날 이기도한 2017년 5월 8일,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을 가득 메운 대선후보들 앞에서 우리는 누구를 기다릴까?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할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공식 선거운동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고 있다. 대선을 코앞에 둔 7일 큰 산불로 피해를 입은 강원도 강릉 성산면 관음2리 버스정류장에 대선후보들의 선거벽보가 부착돼 있다. 기다림의 장소이자 새로운 출발의 장소이기도 한 길가의 정류장에서 대선을 하루 앞둔 그리고 어버이날 이기도한 2017년 5월 8일,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을 가득 메운 대선후보들 앞에서 우리는 누구를 기다릴까?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선동술, 폭력적 정치세력의 결성, 찬탈형식의 정권 쟁취, ‘망상의 국가’ 구축, 폭압적 권력 행사 등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충실한 제자였다(물론 권력을 장악한 이후의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부하 대하듯 했지만).

1919년 총선에서 무솔리니가 이끈 전투단(Fasci di Combattimento)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전투단을 정식 정당인 국가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개편한 뒤 21년 총선에 나서서는 35석을 획득했다.

그는 22년 파시스트 전위대 ‘검은 셔츠단’에게 ‘로마 진군’을 명했다. 그 서슬에 겁먹은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계엄령을 선포하는 대신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집권자가 된 무솔리니는 의회를 위협해 법률 개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일 두체(Il Duce: 수령)’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선동연설에 능했다. 군대의 경례를 로마식 인사로 바꾸는(히틀러도 이를 따랐다) 등 상징조작에도 발군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분열 상태였던 데다 1차 대전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영광 재현’을 기치로 내걸었고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열광했다.

독일의 형편은 더 나빴다. 무엇보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독일의 목을 죄어들었다. 극심한 가난과 사회혼란이 상시화했다. 정부에 불만을 품은 단체가 수십 개나 등장해서 혼란을 부추겼다. 히틀러는 좌파 단체에 대한 정탐활동을 위해 19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azi)에 적을 두었다. 그러다 나중에 정식 당원이 되었고 21년 말 무렵에는 아예 당을 장악했다.

무솔리니가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정권을 접수한 것에 고무된 히틀러는 1923년 11월 돌격대(갈색 셔츠단)를 앞세워 뮌헨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 바이에른 주정부 장악을 목적으로 한 폭동이었는데 쉽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4년 4월 1일 그는 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법정에서의 탁월한 선동적 자기변론에 힘입어 이미 뮌헨의 영웅이 돼 있었다. 그는 란트스베르크 요새에서 8개월간 복역했는데 같이 수감된 부하들, 특히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에게 구술하는 방식으로 '나의 투쟁'을 썼다. 그해 12월, 그는 투옥 때보다 훨씬 신수가 훤해진 모습으로 출옥했다.

1929년 미국 발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에는 더 가혹하게 덮쳤다. 베를린의 한 가정주부가 큰 양동이에 돈을 가득 담고 시장 보러 가던 중에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가 돈은 죄다 쏟아 버리고 양동이만 가지고 도망갔다(데니스 웨프먼 저, 아돌프 히틀러, 김기연 역)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이런 상황의 도움으로 나치는 30년의 선거에서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 그 여세를 몰아 히틀러는 32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경쟁자로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프란츠 폰 파펜 총리가 연립내각 구성을 제의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정치 사회적 혼란을 감당할 수 없었던 파펜은 결국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33년 1월 30일의 일이었다.

이듬해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직을 겸하게 됐다. 그는 절대적 권한을 갖는 ‘총통(Führer)’의 칭호를 원했다. 무솔리니의 ‘수령’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제의는 투표에 부쳐졌고, 투표자의 90%가 이를 지지했다(사실 투표가 민주정치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못 된다. 압도적 찬성투표는 대개 독재를 치장하거나 초래한다).

경제난과 사회혼란 때문에 국민의 불만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 이것이야말로 선동가들과 그 추종세력의 동력이 된다. 국민들은 세상이 아주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경우만이 아니다. 선동적 리더십, 대중추수적 리더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최근 수년 사이에 세계적 경보음의 발신지가 되고 있는 베네수엘라는 포퓰리즘의 먹이가 된 대표적 사례다.

차베스(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는 베네수엘라 빈민의 영웅이었다. 그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자였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응징자였다. 쿠데타와 투옥의 경험을 가진 차베스는 1998년 대선에서 당선했다. 그는 99년 취임하기 무섭게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 개헌을 단행했고 이 헌법에 따라 국영석유회사 페데베사(PDVSA)의 민영화를 금지했다. 이어 03년에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04년 10월에는 완전한 석유주권을 확립했다.

세계 석유매장량 1위의 베네수엘라로서는 이 재산만으로도 부국 행세를 할만했다. 차베스는 외국 석유회사들을 몰아내고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독점했다. 그는 이 돈으로 베네수엘라를 낙원으로 만들려 했다. 교육 의료를 비롯, 다양한 분야에서 무상복지 확대정책에 오일달러를 쏟아 붓고 토지 재분배 정책도 시행했다. 이 같은 포퓰리즘 정책과 두 차례에 걸친 개헌을 통해 그는 대통령 4선을 이뤄냈다.

그러나 차베스의 낙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13년 3월 사망하고 난 후 공짜 복지의 후폭풍이 베네수엘라 경제를 강타했다. 국제유가의 급락 때문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40%선, 수출의 95%, 정부 수입의 절반을 석유에 의존했던 베네수엘라로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언론보도로는 전체 인구 중 75%의 체중이 지난해 평균 8.6kg 감소했다. 가위 살인적 굶주림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예상하는 올해 물가상승률은 720%다. 14년 141.5%, 15년 180.9%, 16년 700%로 악화일로에 있다.

그런데도 집권자와 그 세력은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차베스가 정권을 맡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장갑차까지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를 막아서고 있다. 정책실패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내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밀려나 공석이 된 대통령을 뽑는 조기 선거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탄핵만 당한 게 아니라 형사 피의자로 구속되었고 이에 대한 재판도 시작됐다. 검찰 기소장에 적시된 죄목이 열여덟 가지에 이른다. 탄핵당한 대통령에게 이처럼 많은 혐의를 씌운 예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어쩌면 촛불시위와 당시 야당의 압력 때문에 급급히 수사, 국회 국정조사, 특검 수사, 헌재 탄핵 등의 형식을 빌려 쫓아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확실한 죄인’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흠칫하게 된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다른 모든 나라의 경우도 그렇지만)로 미루어 보자면 현직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처럼 순순히 밀려나가는 예는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은 심성이 너무 순진했거나 권력기반이 너무 취약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일까? 헌재의 탄핵 결정이 나고 왜 당장 청와대를 떠나지 않느냐고, 그게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뜻 아니냐고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르면 자정 전에 당선자가 결정될 것이다. 그 시간부터 제19대 대통령의 임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예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대통령직은 감옥의 담장 위에 놓인 의자와 같다. 내란이나 외환의 죄, 또는 국민에 대한 폭정이나 전 국민의 빈곤화 초래 등의 죄가 아니더라도 약간 휘청거리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자리다. 후보들은 이제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거울 앞에 서 볼 일이다.

또 한 가지 각별히 명심해야 할 것은 대통령직의 중요성이다. 새삼스레 상기시킬 일이 아닌 국민적 상식이긴 하지만 안보, 경제 등 모든 부문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국내외적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대한민국호 운전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나라와 국민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가 성장의 기틀을 잡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저도 인정한다. 그러나 왜 그렇게 되었을까. (중략) 다만 한 가지, 아마 어떤 경우라도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근거는 공무원, 공직자들의 우수성, 해답이 거기에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월 4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가진 경제 관료들과의 오찬에서 한 말이다. 박정희 리더십이 아니었더라도 경제는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뜻이었을 텐데, 이야말로 자기부정의 논리다. 탁월한 리더십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왜 2002년 대선 때처럼, 또 지금처럼 이리도 요란스럽게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인가. 저절로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이라면 북한 김 씨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격려하자고 한 말에 토를 달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어떤 리더십의 소유자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은 앞에 든 몇몇 사례만으로도 설명에 부족함이 없다. 우매하거나 사적, 또는 파당적 욕심이 과한 대통령은 국민을 고통으로 밀어 넣고 만다. 당연히 그 책임은 유권자의 몫이기도 하다. 일찍이 고염무(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가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데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이라 하지 않았던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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