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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주름잡던 조선인 재벌 안록촌을 아시나요


입력 2017.04.09 08:33 수정 2017.04.09 11:11        데스크 (desk@dailian.co.kr)

<호호당의 세상읽기>중국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한 거상

청나라의 강희 황제가 다스리던 1700년대 초반, 당시 우리나라는 숙종 임금의 시절에 중국에는 두 명의 최고 갑부 재벌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놀랍게도 조선인 즉 우리나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런 사실이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알려져 있지가 않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상당수가 알고 있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더라면 벌써 그를 소재로 한 전기소설이라든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만들어 졌을 법도 하다고 본다.

이에 오늘은 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름은 안기(安岐)였다고 하는데 호를 따서 중국에선 일반적으로 안록촌(安麓村)으로 알려져 있다.

안록촌의 생애는 미국의 중국학 전문가인 아서 훔멜이란 분이 편찬한 책에 소개되어 있다.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라 책이고 1943년 미국정부인쇄국에서 발간했다. 나중에 ‘청대명인전략'(清代名人傳略)이란 이름의 중국어판 책이 나왔다. 청나라 시절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전기 모음이란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안록촌은 그 부친이 조선의 외교사절단을 따라서 베이징에 왔다가 그만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강희제는 두 명의 신하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는데 그 중 한 명인 납란명주(만주족)의 눈에 들어 그 집안의 가신(家臣)이 되었다는 것이다. 청 조정 최고 권신(權臣)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던 것이다.(안록촌이 베이징에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부친을 따라왔는지, 또 그 부친은 어떤 연유로 조선의 사절단을 따라왔는지 등등 여타 사정에 대해선 기록된 바가 없다.)

안록촌의 부친은 위풍당당한 조정대신의 집에서 집사 일을 하면서 상당한 재물을 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를 만나려는 사람은 줄을 섰을 것이고 이에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서 청탁을 넣으려면 그 일을 담당하는 집사에게 잘 보여야만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실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김영란 법이 만들어졌겠는가.)

조정대신인 납란명주는 자신의 세력을 관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영리사업도 했던 바, 수익성이 대단히 좋은 소금 도매사업이었다. 안록촌 역시 부친을 따라서 이 일에 관여하다가 나중에 주군 납란명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간에 모은 재산을 기반으로 소금 도매상으로 변신했다.

소금 도매상, 중국식 표현으로 염상(鹽商)은 명대와 청대에 걸쳐 엄청난 특권사업이었다. (중국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강호세력은 그 기반을 주로 소금밀매에 두고 있으며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패권을 놓고 한 판 겨룬 진우량 역시 소금 도매상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염상, 이 염상을 빼놓고선 중국사를 논의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중을 갖고 있다. 명대와 청대에 걸쳐 중국 최대 규모의 사업은 바로 소금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의 염상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해보자.

소금은 주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있는 淮河(회하) 부근의 바닷가에서 생산되었는데 청대에 들어서 특히 회하 남북의 소금 상인들이 엄청난 치부를 했다. 주로 오늘날 안휘성 출신의 이른바 휘상(徽商)이 그 중심이었다.

휘상은 중국 청대 시절에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겼으며 거상(巨商)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하는 중국 상인하면 바로 그들인 것이고 중국에선 휘상을 소재로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청대 말의 거상 ‘호설암’은 장사의 신, 재물의 신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소금 상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소금 생산자이고 또 하나는 소금을 중국 내륙 각지로 운반 판매하는 사업자이다.

안록촌은 처음에 톈진에서 소금 판매업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소금의 집산지인 양주(揚州)로 내려가 전체 유통을 장악했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당시 중국의 양대 재벌 중에 한 명이 된 것이다.

당시 거상을 놓고 북안서항(北安西亢)이란 말이 유행했는데 여기에서 북안(北安)이란 바로 북쪽 톈진의 안록촌을 일컫는다. 오늘로 치면 삼성과 현대에 해당된다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재벌급 부자가 되면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예술품을 많이 모으고 수집한다. 안록촌 역시 그러했다. 많이 수집한 정도가 아니라 수집하는 과정에서 감식안을 키웠고 그 결과 중국 최고의 예술품 감정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물론 사회사업이나 기부도 엄청 많이 했다. 예로서 당시 톈진에 커다란 화재가 닥쳤을 때 그리고 홍수가 났을 때 등등 여러 번에 걸쳐 거액을 기부해서 기반시설을 수리하고 재건축함은 물론이요 수없이 많은 이재민들을 구호했다. 이에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상인들은 청나라 시절부터 집안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자녀 일부는 유명 학자를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유학자로 만들었으며 과거를 통해 권력에도 진출했다. 그리하여 유상(儒商)계층이 등장했다.

유상이란 유교학자이면서 상인을 일컫는 중국식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 안록촌 역시 그런 스타일을 따랐다.

오늘날 중국을 바라보는 외부 사람들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중국의 ‘시장경제형 사회주의’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이는 사실 유교(儒敎)와 상인이 공존해오던 청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사회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엔 중국 공산당이 과거의 유교적 권위를 대신하고 있다. (이거 글로 쓰려면 한참 써야 하는 탓에 참기로 한다.)

돌아가서 얘기다. 안록촌의 예술품 감정가로서의 명성은 당시 실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좋은 일화가 있다.

당시 시점에서 무려 7백년 전인 송나라 시절 산수화의 명인 ‘범관’이 남긴 작품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두 점에 불과하다. 한 점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있는 저 유명한 ‘계산행려도’가 그것이고 또 한 점은 톈진박물관에 있는 ‘설경한림도’이다.

설경한림도는 강희제가 친히 수집했는데 당시 진위 여부를 감정하고 사인을 남긴 이가 안록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감정가로서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말해주는 일화이다.

안록촌은 톈진과 양주에 웅대한 저택을 짓고 살았으며 무수히 많은 귀중 예술품을 소장했으니 그로 인해 청나라 초기 4대 수장가의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예순이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 이력과 함께 소장품을 밝힌 책을 남겼는데 책 제목을 묵연휘관(墨緣彙觀)이라 했다. 오늘날 중국예술사를 연구함에 있어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상 재벌 안록촌이 세상을 뜬 이후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던 모양이다. 안록촌의 그 많은 수장품들은 자손들이 고가의 예술품을 저당 잡히거나 팔아서 생활하다가 결국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강소성 양주시에선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에 관한 자료와 논문들이 소개되고 있다. 양주시엔 그가 살던 저택터가 안가항(安家巷), 즉 안씨 집안의 거리란 명칭으로 지금도 행정구역으로 남아있다. (구글 맵에 가서 安家巷이라 치면 화면에 뜬다.)

참고로 얘기하면 중국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서양그림이 잘 침투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예술을 더 자랑하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 역시 중국화를 무척이나 애호한다. 우리의 김홍도나 정선의 그림도 좋지만 솔직히 말해서 중국화가 기교나 깊이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그림은 약간 소박한 맛이 있다.

이처럼 중국화는 여전히 살아있는 예술양식이다. 우리 한국화가 사실상 죽은 그림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중국화가 저처럼 여전히 활발하게 이어져가고 있는 것일까? 묻는다면 그 답은 중국의 거상들이 명청 시절부터 여러 이유에서 문화 예술을 줄기차게 후원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중세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것 역시 실은 피렌체의 거부이자 권력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활발한 예술 후원 덕분이었다.

줄여 말하면 예술이란 천재 예술가나 그림 상인들보다도 결국은 그를 후원하는 후원자 즉 돈을 통해 발전하고 유지된다. 또 그 과정에서 전체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을 주게 된다.

안록촌 역시 청나라 초기 절대 재벌로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중국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조선 사람이었다.

글/김태규 명리학자 www.hohodang.com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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