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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듯 뻔한 저항의 상시화와 불복의 악순환


입력 2017.04.03 04:28 수정 2017.10.16 09:59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대통령 못해먹겠다던 노 전대통령 전철 새길 것

새 대통령은 제발 국민 갈등 봉합할 넓은 가슴 보이길

박근혜 탄핵인용 다음날인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행동 주최 20차 촛불집회에서 광화문 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대통령 퍼모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박근혜 탄핵인용 다음날인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퇴진행동 주최 20차 촛불집회에서 광화문 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대통령 퍼모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503’이라는 번호를 가슴에 부착한 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지난달 31일 그가 수용실 앞에서 크게 울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이는 믿기 어렵다. 잠시 멈칫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소리를 내 운다는 것은 이분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교도관들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방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라고 달래서 들여보냈다는 장면 묘사도 많이 억지스럽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심장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잠결에 누군가에게 끌려와서 ‘감빵’이라고 통칭되는 격리시설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을 듯하다. 아마 앞으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나는 무고합니다. 나는 그 포주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으면서 내게 누명을 씌운 겁니다.”

“그래 맞아. 그렇지만 너의 진짜 범죄는 포주의 죽음과는 상관없어.”

“그럼 뭡니까?”

“너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를 지었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너를 기소한다.”

그 순간 빠삐용은 유죄를 인정했고, 재판관은 그 죄에 상응하는 형벌은 사형임을 알려준다.
빠삐용은 돌아서 걷는다.

“유죄, 유죄, 유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꿈에서 깨어난다. 영화 ‘빠삐용’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다. 박 전 대통령의 자기 성찰이 어디에까지 이를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 마음의 안정부터 하루라도 빨리 되찾기를 기대한다.

그는 시종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왔다. 헌법재판관들은 그가 검찰과 특검의 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부했다는 점을 들어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임 중 형사소추를 면제받는 대통령에게, 수사 비협조 책임을 묻는 게 옳은 것인지는 지금도 의아스럽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다시 짚고 가자.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각부의 장·헌법재판소 재판관·법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감사원장·감사위원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대한민국헌법 65조 1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84조)

그러니까, 대통령도 탄핵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 사유는 내란이나 외환 또는 이에 버금가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때에 한정돼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비전문가의 상식적 판단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법은 법률전문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국민 모두를 위해 제정되고 시행된다고 믿는다. 국민에게 난해한 법이라면 이미 법이 아니다. 특히 헌법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게 잘못된 인식일까?

중국 고대 진나라 상앙의 ‘엄혹한 법치’는 결국 그 자신을 죽음에로 내몰았다. 그 시대에 법이란 곧 형(刑)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법치는 그런 것일 수 없다. 국민을 권리침해로부터, 억울함으로부터 지켜주는 민주적 울타리가 곧 법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징벌을 능사로 하는 법집행이나 사회분위기는 민주국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특징이라고 하기 어렵다.

박 전 대통령이 취임한 후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언론에 의해 폭로됐을 때까지, 또 그 후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했을 때까지도 대한민국의 헌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헌법질서가 심대한 위협을 받는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사법적 과오에 대한 탄핵이나, 검찰의 기소 → 법원의 판단은 퇴임 후에 이뤄져도 문제될 게 아니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심각한 후유증, 부작용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를 책임지는 국가의 제1 정치리더다. 그런데 정당, 헌재, 검찰, 특검이 그 권한과 역할을 대신하게 될 것만 같다. 이른바 ‘검찰공화국’이 명실상부하게 성립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렵기조차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가 없었더라도 정당들이나 국회가 그처럼 쉽게 탄핵소추를 결행할 수 있었을까?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세워진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선례는 재연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다. 국회‧헌재‧검찰‧특검은 ‘제왕적 대통령’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킨 게 아니라, 기껏 측근의 병풍 역할이나 할 정도의 힘밖에 없는 대통령을, 대단히 허풍스럽게 몰아냄으로써 너무 위험한 선례 하나를 더 보탠 것일 지도 모른다.

이제 박 전 대통령은 갇혀 사는 몸이 됐다. 그는 그간 단 한마디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구속 수감되었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그 믿음이 달라지겠는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피의자가 계속 범죄 사실을 부인해온 것으로 미루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확신한다 하더라도 일단은 혐의사실을 시인해야 구속을 면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으스스하다.

챔피언은 인생의 온갖 신산을 다 겪은 끝에 정상의 허망함을 안고 상처투성이로 링을 떠나는데 다음 경기를 위해 그 링을 향해 가는 유망 신인 복서는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친다. “기다려, 내가 곧 상대해주마!” 영화 ‘로키’에서(시리즈 가운데 어느 편이었는지는 잊어 버렸지만) 본 장면이 떠오른다.

유력 정치인들이나 정치적 명망가들이 다투어 대선전에 뛰어드는 것을 보는 마음이 어쩐지 아슬아슬하다. 누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음 대통령은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과 위기감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던 2003년 5월 21일에 토로한 심정이었다. 앞으로라고 ‘대통령의 길’이 순탄해질 리는 없다. 오히려 악화될 개연성만 커졌다.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태극기집회도 대규모화‧장기화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유력해 보이는) ‘진보의 집권’이 이뤄질 경우, 보수세력은 정권 출범 초부터 저항전선을 구축할 공산이 크다. 부분적으로는 복수심에 추동되어, 이들은 더욱 격렬하게 정부에 맞서지 않을까? 대개의 경우 공격‧저항하는 측이 더 집요하고 거칠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민중총궐기 등의 예만으로도 설명은 부족하지 않다.

따라서 이제 유력주자들과 그 소속 정당들은 당선 이후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국민적 저항 대신 지지를 이끌어내느냐에 대해 지혜를 모으는 게 긴요하다. 전임자들의 불행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집권기를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증진 시대로 만들 포부와 비전은 물론 실천 가능한 계획까지 마련해 제시할 것이 요구된다.

정권쟁취, 대통령직 장악의 환희에 취해 본분과 책무를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할 경우 대중은 어김없이 공격할 것이다. 햇빛은 밝음만이 아니라 어둠도 만든다는 것을 유념할 일이다. 국민의 이해와 아량은 더 이상 기대할 바 못된다. 대중은 집권자에 대해 대단히 인색해졌다.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의 수가 더 많다고 자신할 일이 아니다. 수적 열세에도 저항자들은 지치지 않는다. 집요한 쪽이 이긴다는 것은 ‘박근혜 탄핵정국’이 이미 입증했다.

이렇든 저렇든 대선이 36일 앞으로 다가왔다. 때 이른 주문이지만, 새 대통령은 자신의 품을 넓혀야 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도 했던 주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런 기대를 비켜가고 말았다. 천하를 다 품고도 그만큼 더 여지가 있어야 할 대통령이 소통을 외면하고 비판에 귀를 막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자신을 좌절에 이르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음을 이제는 깨달았을까? 때는 늦었지만 깨달음을 얻었다면 역사에 남을 자신의 이미지를 바로 잡기 위해 이후에라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강조하자.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고 재확인할 책무를 진다. 대통령이 봉사해야 할 대상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대통령은 당연히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 그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들이다. 그 모든 것 위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과 염려임을 특별히 말해두고 싶다.

사랑이 없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비극이다. 권력은 흔히 양날의 칼로 비유된다. 국민을 위해 쓸 수도 있지만 국민에 대해 쓸 수도 있다. 권력의 폭력성을 제어하는 힘이 바로 국민에 대한 사랑과 염려이다. 그게 사라지면 그 자리를 폭력성이 차고앉는다. 물리적 폭력만이 위험한 게 아니다. 독선적 언행과 정책으로 국민적 갈등의 골을 깊게 파는 것은 더 무서운 폭력이다. 이런 행태가 저항의 상시화와 집요한 대통령 축출 시도를 초래할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대선주자들은 온 세상을 다 품고도 남음이 있을 넓은 가슴을 바로 지금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기 바란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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