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그 때 SK가 111억을 내지 않았더라면?

최종편집시간 : 2017년 06월 26일 19:02:35
[기자의눈] 그 때 SK가 111억을 내지 않았더라면?
미르·K스포츠재단 출범 당시 최순실 사익 목적 인지 못해
대기업 대부분 참여하는 공익 사업 외면했다간 여론 비난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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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9 07:00
박영국 기자(24pyk@dailian.co.kr)
▲ 2015년 10월 27일 미르재단 현판 제막식 장면.ⓒ전국경제인연합회

요즘 SK그룹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연초부터 대기업 중 유일하게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한껏 띄웠던 기세도 축 가라앉았다. 검찰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수사 2라운드에서 기업 수사의 첫 타깃이 돼 그룹 총수인 최태원 회장과 전·현직 수뇌부가 줄줄이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화근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111억원을 출연한 일이다. 그 시기를 전후로 최태원 회장의 사면되고 면세점 추가 승인 대상에 선정(결국 탈락하고 사업을 접었지만)됐다는 이유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게 됐다.

공익사업에 대한 기부 차원이었다고 아무리 외쳐도 안 믿어준다. SK그룹 내부에서는 정부에서 좋은 일 하겠다고 동참하라고 할 때마다 꼬박꼬박 돈을 내놓지 말걸 그랬다는 한탄도 들려온다.

문득 궁금해졌다. SK가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포털 사이트에서 이들 재단이 설립된 시기에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찾아봤다.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한류를 넘어 음식과 의류, 라이프스타일 등 신 한류 확산을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린다는 취지에서 국내 주요 그룹 16곳이 약 490억원을 출연해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2015년 10월 27일자로 나온 주요 언론 기사에서 미르재단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미르재단 현판 제막식에 맞춰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전경련을 취재하는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비슷한 취지로 보도했다. 물론 본지도 마찬가지다.
▲ 2015년 10월 27일 미르재단 현판 제막식 당시 주요 언론에 보도된 미르재단 관련 기사들.(네이버 검색 화면 캡처)

이 시점에 미르재단이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과 연관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언론사는 없었다. 당연히 국민들도 ‘좋은 일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국정농단의 공범, 혹은 조력자로 지목되는 일부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을 제외하고는 정부 기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1년 넘게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보도 내용에는 미르재단에 출연한 기업들도 언급돼 있었다. 삼성·현대차·SK·LG·포스코·롯데·GS·한화·KT·LS·한진·CJ·금호아시아나·두산·대림·아모레퍼시픽 등으로, 흔히 말하는 재계 서열 순이자, 출연 금액 순이다. SK는 세 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다.

만일 여기서 SK의 이름이 빠졌다면 어땠을까. 일단 국민의 한 사람 입장에서 SK가 괘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경제 살리기를 위해 기업들이 힘을 모았는데 재계 3위 기업이 돈 아깝다고 쏙 빠졌으니 말이다.

기자 입장에서는 당장 ‘재계 3위 SK 한류 확산 공익사업 외면’ 정도의 타이틀로 데스크에 기사 계획을 제출했을 것이다. 어쩌면 SK가 참회하고 재단 출연을 결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비난 기사를 쏟아냈었을 수도 있다.

당시는 국정농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일당을 제외한 우리 모두 미르재단이 공익적인 목적에서 설립됐다고 믿고 있었고, 기업들로 하여금 공익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언론사의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SK는 재계 서열에 걸맞은 금액을 재단에 출연했기에 그런 비난 기사를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불행하게도 SK는 그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 박영국 산업부 차장대우.
앞서 언급했지만 2015년 10월 27일에는 국민들과 언론은 물론, 정부나 정치권에서조차 대부분 미르 재단이 공익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기업들이 정부나 정치권보다 정보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기업들은 예로부터 정부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가는 큰 불이익을 당한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SK를 비롯한 기업들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공익 재단으로 인식하고 총 774억원 규모의 사기를 당한 셈이다.

보통은 사기를 당하면 민사 소송을 통해 피해금액의 일부나마 돌려받지만 미르·K스포츠재단에 사기를 당한 기업들은 돈 돌려받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오히려 그게 뇌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총수를 비롯한 임원진이 구속되고 천하의 악덕 기업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기업들은 정부나 경제단체 주도의 공익사업 뿐 아니라 연말 이웃돕기에도 성금을 내고 지진이나 홍수 피해가 나도 돈을 걷어 구호자금을 마련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기자 역시 좋은 일에 돈 쓰는 기업을 칭찬하고 짠돌이 기업을 비난하는 기사를 쓰는 데 고민이 많아질 것 같다.[데일리안 = 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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