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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선 한국의 대의민주정치


입력 2017.03.06 07:35 수정 2017.10.16 10:00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야당·적대적 사회 세력, 취임 초부터 박 대통령 공격

시위·여론조사, 공직자 평가 및 임면 근거될 수 없어

지난 3월 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과 서울광장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주최한 제16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탄핵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지난 3월 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과 서울광장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주최한 제16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탄핵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진실이 달리 있다는 것을 그 때 이미 알았지만 분위기 때문에 진실로 가장된 반진실 혹은 비진실의 편에 서야 했다.”

이런 말은 그 자체로 역사에 대한 범죄다. 엎질러진 물은 되 담을 수가 없다. 그릇을 엎지르기 전에 충분히 고민하고, 이를 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에라도 매달려야 한다. 그게 민주시민의 도리이자 책무다.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인사들의 경우야 더 말할 게 있으랴.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3주 연속 4~5%의 유례없이 낮은 수치로 추락하였으며 2016년 11월, 12월 및 같은 달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 1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촛불집회와 시위를 하며 대통령 하야와 탄핵을 요구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질타하고 더 이상 대통령 직책을 수행하지 말라는 국민들의 의사는 분명하다. 주권자의 뜻은 수많은 국민들이 세대와 이념과 출신지역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행하는 집회와 시위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박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 결론 중 한 부분이다. 13개의 소추사유가 적시됐지만 핵심적 배경 명분 이유는 이 문장들에 다 들어 있다. 그러니까 여론 조사 지지율이 형편없이 추락했고, 하야 및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의 기세가 엄청나니까 대통령을 파면시키는 게 당연하고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실 야당들, 그리고 적대적인 사회 세력들은 취임 초부터 박 대통령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2012년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탈환에 실패한 당시의 통합민주당은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당의 경우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에 반발해서 그 이듬해 8월 1일부터 장장 101일간에 걸친 천막당사 투쟁을 벌였고 김한길 당시 당 대표는 서울광장 텐트 안에서 ‘노숙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당 소속 의원들은 대거 촛불집회에 참여해 ‘바뀐애 방빼, 바꾼애들 감빵으로’라는 피켓을 들고 박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그런 전력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라는 물실호기를 놓치려 할 리 없었다. 이 당의 문재인 전 대표가 촛불집회의 초기부터 참여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까닭이 달리 있었을까? 대통령직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마음이 급해졌다고 보는 게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그는 촛불집회의 규모와 그 분위기에 고무돼 “가짜 보수 정치 세력, 거대한 횃불로 모두 태워버리자”, “광주 시민들이 촛불을 횃불로 만들었고 그 횃불이 이 세상을 바꾸는 들불로 번지게 해 달라” “탄핵이 기각되면 그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 등의 과격한 선동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박 대통령 파면은 국론분열이 아니라 국론통일에 기여할 것”이라고 국회의원 234명은 탄핵소추안을 통해 장담했다. 태극기집회가 수적으로 촛불집회를 압도할 날이 올 것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촛불집회에 희망을 건 야당 리더들의 서슬에 압도된 때문이었을까. 촛불은 광명한 세상에 대한 희구, 기도의 대상을 향한 간절한 기원,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희생정신을 상징한다. 그러나 밤의 광장에서 대중이 함께 들어 올리는 촛불은 남에 대한 위압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게 탄핵소추의 결정적 동인이 되었을까.

탄핵소추안의 논리와 주장이 통할 수 있다면 대의민주정치는 근본에서 재구성돼야 한다. 대규모 시위와 여론조사 결과가 공직자에 대한 평가 및 임면의 근거가 된다면 대의정치의 근간인 정기적 선거와 주요 공직자의 임기제가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 제도는 자의적 권력장악과 장기집권의 폐해를 막아주는 제도적 장치로서 민주정치의 근간이자 표상이다.

동시에 이는 정권담당세력이나 집권자 혹은 주요 공직자들에게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심조석변(人心朝夕變)’이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바뀔 수가 있다. 사회 상황도 변화무쌍하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것을 기준 삼으면 정치는 상시적 혼란에 빠지게 되고 당연히 민주정치는 확립되지 못한다.

대규모 민중집회나 여론조사는 그 당시의 국민적 분위기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로서는 효용성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선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런데 21세기의 민주국가 한국 국회에서는 군중집회와 여론조사 결과가 대통령도 몰아낼 수 있다는 해괴한 신조가 득세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각자가 국민의 대표임을 과시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게 있다. 권력분립제 하의 직선 대통령 또한 국회나 마찬가지로 국민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촛불민심’을 강조하면서 ‘태극기민심’을 무시하는 이들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곱씹자면 이렇다. 국회는 공소장 2건, 헌법재판소 결정문 1건, 대법원 판결문 1건, 대통령 시정연설문 1건, 대통령 담화문 1건과 15개 사안에 대한 보도 기사를 ‘증거 기타 조사 상 참고 자료’로 첨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 헌재로 보냈다. 그리고 헌재는, 탄핵소추 절차는 국회의 재량으로 인정하고 내용만으로 심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탄핵소추 문제가 제기된 배경 과정 절차는 논외로 하고 국회가 ‘대통령의 죄상 혹은 과오’라고 열거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판단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비전문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어떻든 헌법재판관들은 고매한 인격과 고도의 법률지식으로 사안의 본질과 내용을 꿰뚫어보고, 그런 다음에도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후 역사를 생각하며 판단을 내리리라 믿고 기대한다. 그렇지만 국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좀 있다. 촛불군중의 위압적 분위기에 쫓겨 급급히 소추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강행하는 듯한 그 장면 장면들은 시쳇말로 ‘웃픈’ 코미디였다.

사실 그간 국민에게 격심한 실망과 분노를 안긴 정치집단은 정부가 아니라 국회였다. 19대 국회는 무능 무례한 ‘식물국회’로 규정됐었다. 정당마다, 후보마다 거창한 공약을 내걸었지만 20대 국회는 더 큰 실망을 안겼다. 정치 과정은 진전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아예 퇴행을 거듭하는 인상을 주었다. 국민에게 면목이 없게 된 국회와 여야 정당들이 대통령을 희생양 삼아 위기 돌파를 기도한 게 탄핵소추 아니던가.

어쨌든 이제 헌재의 결정만을 남기고 있다. 9일에서 13일 사이에 현직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재의 결정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6일부터 통보 가능기간에 들어간다. 또 이날엔 특검의 수사결과 발표가 예정돼 있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라고 긴 이름을 달고 있지만 핵심적 관심사는 ‘대통령의 죄과’ 유무, 또는 다과이다. 수사 결과가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면 헌법 재판관들이 참고할 수도 있다. 그래서 특검은 활동기간 종료 후에도 여전히 위력적이다.

전문가들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터라 포기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국회든 헌재든 국가와 국민의 장래에 대해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결정을 할 경우는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와 방법과 절차로 해 줄 것이 요청된다. 스님들끼리는 선문선답 식의 대화를 하더라도 중생에 대해서는 중생의 언어로 말해 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좀 쉽게 대답해 주시라. 현직 대통령이 공공연히 의도적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았는가. 국민직선의 대통령으로서 통치권적 재량권을 용인될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행사했는가. 1년도 채 안 남은 임기조차 못 채우게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한가. 권력을 이용해서 수천억 원 혹은 수조 원의 개인적 축재를 했는가. 정해진 임기를 넘어 장기집권을 획책했는가. 권력강화를 위해 입법부를 강제‧탄압했는가. 입법부의 역할과 기능, 그 권위를 박탈할 음모를 꾸몄는가.

이런 의문에 답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무능하니까 쫓아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임기제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기간 동안 재임을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이른바 진보적 가치, 좌파적 목적의 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해서도 곤란하다. 그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공공연히 법치 체계를 위협하는 일이 되고 만다. 태극기집회 측이, 탄핵소추와 퇴진압박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게 그 때문일 터이다.

대통령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위기가 조성된 게 아니라면 임기를 채우게 할 일이다. 무엇보다 민주제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탄핵(소추)권 행사의 절제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 탄핵소추에 재미를 붙였는지 야당 일각에선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에 대해서까지 탄핵을 운위했다. 상시탄핵체제가 되는 셈인가.

발상지 미국에선 이미 없어진 특검제도에 집착해서 정치적 문제만 생기면 특검 운운하는 것 또한 한국 국회의 특징적 행태다. 국회를 주도하는 야당은 상설특검제도가 있는 데도 별도의 특검법을 기어이 만들어 냈다. 이런 국회, 이런 정당들이 다음, 그 다음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입맛을 다시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목하 한국은 탄핵의 시대, 그 긴 터널 속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조금이라도 더 잘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인데….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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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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