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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제 성향 정책 추진 못하는 '식물국회'의 현주소


입력 2017.02.20 06:30 수정 2017.02.20 07:17        권혁식 정치부장(부국장) (kwonhs1234@dailian.co.kr)

국회법 개정 이후 여야 합의 없으면 '색깔' 법안 통과 불가능

무색무취 중도성향 법안만 가결…'다수결 원칙' 활성화 필요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 국회는 2012년5월 국회법 개정 이후 여야 합의 없이는 쟁점법안 처리가 힘들어져 '식물국회'란 지적을 듣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 국회는 2012년5월 국회법 개정 이후 여야 합의 없이는 쟁점법안 처리가 힘들어져 '식물국회'란 지적을 듣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야권이 이달 28일 종료되는 박영수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에 목을 매고 있다. 현행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법’ 제9조제2항에 규정된 수사시간 70일로는 수사완료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동법 제3항에 나와 있는 ‘30일 연장’ 방안을 황교안 대통령 직무대행이 승인해주길 요구하고 있다.

범여권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황 권한대행이 이를 승인해줄지 여부는 현재로선 가늠하기 힘들다. 30일을 연장해주면 3월30일까지 특검 수사가 가능해진다. 만일 헌재가 세간에서 점치는 3월10일에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리면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상 보장되는 ‘불소추 특권’이 사라지고 구속 상태에서 특검 수사를 받아야 하는 지경으로 몰릴 수 있다. 설사 박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고 보수층 표심이 결집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더라도 원인 제공자에 대한 보수층의 원망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은 황 권한대행의 ‘승인’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야권은 황 권한대행이 기간연장을 승인하지 않을 것에 대비해 지난 6일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법 개정안을 발의해둔 상태다. 개정안에는 특검 수사기간을 기존 70일에서 120일로 50일 늘리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개정안은 해당 상임위인 법사위의 자유한국당 간사 김진태 의원의 거부로 상임위 전체회의에 상정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자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국회의장 직권상정’ 카드까지 끄집어냈다. 의장이 특정 안건에 대해 심사기간을 지정한 뒤 그 기간을 넘기면 직권으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는 제도다. 국회법에 명시된 직권상정 요건은 천재지변, 국가비상사태,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들과 합의하는 경우 등 3가지다. 우 원내대표의 발언은 한국당, 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4당 교섭단체 대표들과의 합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 법사위 한국당 간사가 거부해도 같은당 원내대표는 찬성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우택 한국당 원내대표는 19일 특검 수사기간 연장 반대 입장을 시사했다. 현재로선 국회의장 직권상정도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이런 모습은 지난 2012년 5월2일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일명 ‘국회선진화법’) 통과 이후 계속돼온 ‘식물국회’의 한 단면이다. 개정안에서 핵심내용은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 강화다. 종전에는 국회의장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안건이나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수 있었으나 법 개정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3가지 경우 외에는 불가능하다. 상임위나 법사위에서 여야 간 입장차로 법안이 발목 잡히더라도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다. 지난 19대 ‘여대야소’ 국회에서 여당이 주로 피해자였다면 지난해 4월 20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국회에선 야당이 다소 손해를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행 국회법 체제에선 모든 안건은 여야 합의가 선행돼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다. 그 바람에 헌법과 국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다수결 원칙’은 적어도 상임위 심사에선 공염불에 불과하다. 헌법 제49조에는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국회법 제54조는 ‘의결정족수’에 대해 ‘위원회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라고 명시해 헌법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다수결 원칙’이 활성화하기 위해선 쟁점 안건에 대해 표결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 안건 심의의 첫 관문인 상임위에선 관행적으로 표결 이전에 여야간 합의를 먼저 요구하고 있다. 만일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안건을 표결에 부쳐 통과라도 시키면 어김없이 ‘다수당의 폭거’, ‘소수의견 무시’ 등 맹비난의 표적이 된다. 뒤이어 소수당의 의사일정 전면 거부로 비화돼 국회 전체가 마비되기 일쑤다. 정우택 원내대표가 최근 환경노동위에서 야3당이 청문회 안건을 일방처리한 것을 놓고 "소수여당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제1당이 다수결로 처리한다면 다른 상임위에서도 안건을 다 통과시킬 수 있다"면서 한국당의 '국회 보이콧'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찬찬히 문구를 뜯어보면 과거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발 성명에 자주 등장하던 표현들이다. 단지 ‘소수야당’이 ‘소수여당’으로, ‘다수여당’이 ‘제1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직권상정 요건을 강화하는 대신에 국회법에선 보완책으로 ‘안건 신속처리(패스트 트랙 )제도’를 신설했으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해당 안건 지정을 위해선 상임위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요구되며, 설사 지정됐다 하더라도 상임위에서 본회의 부의까지 최장 330일이 걸린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11개월 뒤를 기약하고 패스트 트랙에 운명을 맡겨놓을 민감 법안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까지 패스트 트랙을 이용 중인 법안은 지난해 12월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 한 건뿐이다.

이런 국회법의 한계 때문에 여야 간에 입장이 확연히 갈리는 쟁점 법안은 본회의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국회법 개정 이후 지금까지 보수정권 5년 동안 보수성향 정책들이 근거 입법 실패로 사장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로 경제활성화를 위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안이 2012년7월 발의됐으나 19대 국회 임기만료 때 폐기됐다. 2016년5월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됐으나 현재까지 기획재정위 법안소위에 계류돼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위한 노동 4법(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파견법)도 19대 국회 임기만료 폐기를 거쳐 20대 국회에서 재차 발의됐으나 현재 야당 반대로 환경노동위를 통과 못하고 있다.

요즘은 야당도 국회선진화법의 위력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진보진영의 고유 브랜드인 ‘경제민주화’ 실천 방안을 담고 있는 상법 개정안을 지난해 11월 발의했으나 해당 상임위인 법사위 통과가 여의치 않다. 한국당 간사인 김진태 의원을 포함해 일부 의원들 반대 때문이다. 그러자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4일 여야 4당 원내대표 합의를 전제로 의장 직권상정을 요청하겠다는 입장을 보여 재계가 초긴장 상태다. 자연히 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의 선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법안 내용을 떠나 야당이 그간 ‘노동4법’의 발목을 잡고 애 먹인 구원(舊怨)을 생각하면 찬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으로 조기대선이 치러지면 빠르면 3개월 내에 여야의 처지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어느 당이 집권하더라도 ‘여소야대’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야권 대권주자들은 ‘연정론’을 제기하고 있다. 과거 ‘DJP 연대’처럼 선거 국면에서 후보단일화로 연대한 뒤에 집권 성공 뒤에는 권력을 나눠 연립정부를 세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야권이 연정에 성공해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의석이 새로운 여권으로 뭉친다 하더라도 94석의 자유한국당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의안처리를 밀어붙이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의장 직권상정을 위해선 한국당 원내대표의 합의가 필요하고 패스트 트랙을 활용하기 위해선 장장 11개월을 지체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본인들이 소수일 때 ‘여야 합의’ 관행의 혜택을 봤던 빚도 갚아야 할지 모른다.

국회법 개정 5년을 뒤돌아보면, 보수정권은 제 성향에 걸맞는 정책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과오로 심판대에 올랐다. 야당은 기왕에 못 먹는 밥상에 ‘법안 발목잡기’로 재 뿌리는 데만 익숙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여야가 바뀌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중도 성향의 무색무취한, 어중간한 정책법안들만 여야 합의를 거쳐 국회를 통과하기 쉽다. 보수든 진보든 이념 색채가 뚜렷한 민감 법안들은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온갖 불길한 예언에 휩싸여 국회에서 질식사하는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대선 승패가 어떻게 결론날지 아무도 점칠 수 없는 현 시점은 여야가 기득권에 얽매이지 않고 ‘식물국회’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떻게든 ‘5분의 3 이상’ 의석을 확보해 힘의 논리를 추구하려는 것보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인 ‘다수결 원칙’에 여야가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상임위 심의 단계에서 쟁점 안건에 대해선 자유로운 표결이 보장되고 결과에는 모두가 승복할 것에 합의함으로써 다수결 원칙이 활성화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을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여당에는 제 색깔에 맞는 정책을 구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그에 대한 책임은 다음 선거에서 엄정하게 심판받도록 하는 게 의회정치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권혁식 기자 (kwonhs123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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