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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눈물로 바위에 새긴 글의 의미가...


입력 2017.02.12 07:31 수정 2017.02.12 07:51        데스크 (desk@dailian.co.kr)

<어느 퇴직부부의 신나는 전국여행-열여아홉째>

예송리해수욕장~세연정 및 보길윤선도원림~땅끝마을~녹우당 등 고산 윤선도유적지

【7.25(토), 열아홉 번째 날】

보길도를 왕래하는 카훼리.ⓒ조남대 보길도를 왕래하는 카훼리.ⓒ조남대
검은 몽돌이 깔려있는 예송해수욕장.ⓒ조남대 검은 몽돌이 깔려있는 예송해수욕장.ⓒ조남대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보길도행 배를 타기 위해 6시 반쯤에 일어났다. 아침 식사로 컵라면을 먹고 땅끝 선착장으로 갔다. 이른 시각이라 배를 타는 사람과 차가 많지 않았다. 「뉴장보고」라는 큰 카페리에 차가 3분의 1도 차지 않았다. 30분 만에 노화도 산양선착장에 도착했다. 최근에 노화도에서 보길도로 가는 보길대교가 연결되어 배는 육지에서 가까운 노화도까지만 간다.

노화도를 거쳐 보길도로 차를 몰았다. 먼저 예송해수욕장과 상록수림에 도착했다. 해변이 검은 몽돌로 되어 있다. 해변이 깨끗한 데다 기온이 31도까지 오르는 더운 날씨임에도 해변에는 해수욕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참 이상하다. 민박집은 많은데 이 성수기에 손님이 없다면 어떻게 1년을 살아갈지 걱정이다.

다시 되돌아 나와 통리·중리해수욕장을 갔다. 중리해수욕장은 깨끗한 은모래로 되어 있으나 여기도 해수욕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해수욕장이 청소가 안 되어 있는 등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해수욕할 분위기가 아니다.

송시열 선생이 바위에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쓴 글쒼바위.ⓒ조남대 송시열 선생이 바위에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쓴 글쒼바위.ⓒ조남대
보옥리 공룡해변.ⓒ조남대 보옥리 공룡해변.ⓒ조남대
보옥리 공룡해변. 해변의 돌이 공룡알처럼 크고 무겁다.ⓒ조남대 보옥리 공룡해변. 해변의 돌이 공룡알처럼 크고 무겁다.ⓒ조남대

조금 더 달려가니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가 있다. 송시열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 가다 풍랑을 만나 며칠 보길도에 쉬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한시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내용은 ‘여든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대궐에 계신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갖옷 내리신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라는 뜻이란다.

숙종 14년(1688년)에 희빈 장 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정했다. 우암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귀양 갔다 국문을 받기 위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다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단다.

대단한 선비 정신이다. 국가를 위해 소신을 갖고 한 말 한마디로 83세의 상노인이 멀리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도 과거 임금님께 입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등 순응하는 자세가 우러러 보인다. 요즈음의 세태와는 전혀 다르다.

다시 되돌아 나와 보옥리공룡해변을 찾아갔다. 해변의 검은 돌이 공룡 알처럼 아주 크고 둥글다. 또 들어보니 크기에 비해 보기보다 상당히 무겁다.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날씨가 엄청 덥지만 그래도 바람이 불어 다닐만하다.

윤선도 선생이 보길도에 오게 된 계기는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 발발 소식을 듣고 임금님이 계시는 강화도로 갔으나, 인조가 이미 강화도에서 나와 남한산성에서 청에게 항복했다고 소식을 듣자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 경치에 취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단다.

윤선도 선생이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세연정 풍경.ⓒ조님대 윤선도 선생이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세연정 풍경.ⓒ조님대
윤선도 선생이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세연정 풍경.ⓒ조님대 윤선도 선생이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세연정 풍경.ⓒ조님대
7월 하순에 보길도 부용동원림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조남대 7월 하순에 보길도 부용동원림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조남대
윤선도 선생의 각종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부용동원림(명승 제34호).ⓒ조남대 윤선도 선생의 각종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부용동원림(명승 제34호).ⓒ조남대

보길도 부용동원림(명승 제34호)은 세연정을 비롯하여 동천석실 등 고산이 13년간 오가며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한 산실이란다. 세연정의 풍광과 경치는 주변 자연과 너무 잘 어울린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니 더운 여름인데도 시원하다. 정자 가운데는 군불을 때어 덥힐 수 있도록 온돌로 되어 있다. 그 당시의 이런 정자를 짓고 조경을 하려면 엄청난 부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 주차장 옆에 시골 할머니들이 무더운 날씨에도 미역과 다시마 등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다며 경희가 하나 팔아주자고 하여 미역한 묶음을 사자, 할머니가 “점심때가 다 되어가는 데도 오늘 이제 마수 했다”며 기뻐하신다. 바로 옆에서 다시마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는 미역을 판 할머니를 보고는 “형님 오는 복 터졌소” 하며 부러워한다. 우리는 차를 몰고 나오다 부러워하는 할머니가 측은한 생각이 들어 되돌아 가 그 할머니로부터 다시마를 샀다. 그러자 할머니는 경희를 보고 “얼굴도 예쁘면서 마음씨까지 곱다”며 칭찬을 하신다.

노화도 산양선착장에 12시 30분쯤 도착하자 원래 배가 1시에 있었는데 오늘은 1시 반에 나간단다. 한참 기다리니 농협 소속 배가 들어오더니 자기들 차 2대만 달랑 싣고는 그냥 나가버린다. 또 늦어져 2시가 되어야 배가 온단다. 1시간 반 이상 기다리다 2시 배를 타고 나왔다. 곧 태풍이 오기 때문에 지금 나가는 배가 마지막 배란다. 지금은 전혀 태풍 기미가 없는데. ‘폭풍전야라는 말이 있더니만 그런 상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남에 도착하여 땅끝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조그만 산 정상까지 가는 모노레일을 1인당 5천 원이나 주고 탔다. 모노레일을 내려 땅끝까지 가는 길의 계단이 엄청 많다. 오래전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올 때는 이렇게 멀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상당히 멀다는 느낌이 든다. 땅끝탑(북위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01초)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조금 쉬다 올라왔다. 계단이 850개나 된다나. 무척 힘들다. 경희는 무더운 여름에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상당히 고생이 될 텐데도 별 불평이나 힘들다는 이야기 없이 잘 다닌다. 고맙고 대견하다.

정상에 도착하여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 봤다. 해남 주변 온 바다가 다 보인다. 전에 왔을 때는 차로 정상 바로 아래 주차장까지 와서 토말탑까지 갔는데 모노레일이 생기고 나서는 관광객을 모노레일로 유도하기 위해 자동차로 정상까지 가는 길은 거의 표시도 해 놓지 않은 것 같다.

진도 팽목항과 운림산방으로 가려다가 시간이 늦어 제대로 구경을 못 할 것 같아 오늘은 오래전에 와 본적이 있는 해남 천일식당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기로 하고 식당을 찾다가 아직 5시 반밖에 되지 않아 한 곳을 더 구경하려고 물색하다 녹우당을 방문키로 하고 찾아갔더니만 아직 6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매표소 문이 잠겼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조님대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조님대

표도 끊지 않고 녹우당과 사당 등을 관람했다. 녹우당은 효종이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수원 집을 하사했는데, 현종 9년(1688년)에 수원 집을 헐어 배로 이곳으로 옮겨와 지은 것이란다. 녹우당(사적 제167호)은 덕음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에서 정중앙으로 뻗어 내려온 지점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조금 위쪽에 그의 조상 어초은 윤효정의 묘와 사당 그리고 고산 사당이 있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너무 좋은 터다. 온 산골짜기가 모두 해남윤씨 집안 땅인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은 산 중턱에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숲이 있다고 해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자 비자나무숲이 아니라 여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있다. 이 비자나무는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효정이 500년 전에 심은 것으로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0m 내외이며, 가슴높이의 지름이 1m 정도나 된다.

경희는 더운 날씨로 힘이 든 데다 해 질 녘에 울창한 숲 속을 둘이서 가자니 무서워서 그런지 가고 싶지 않아했지만 내가 막무가내로 올라가니까 마지못해 따라와서는 비자나무를 보더니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나도 땀으로 옷을 흠뻑 적시며 힘들게 올라왔지만 멋있는 비자나무와 쭉 뻗은 금강송을 보자 올라와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녹우당 앞에는 윤효정이 아들 진사시 합격을 기념하여 식재한 것으로 500년이나 되어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지키고 서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옛날에 와서 맛있게 먹은 적이 있는 천일식당으로 갔다. 1인당 2만 8000원 하는 떡갈비 정식을 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미흡하다. 반찬은 23가지나 나왔지만 질적으로 과거보다 많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막걸리 한 병을 시켜 경희하고 맛있게 먹었다. 둘이 한 병을 마셨더니 취한다.

취한 몸으로 숙소를 찾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 3만원을 주고 남도장이라는 꽤 괜찮은 숙소를 구했다. 오늘도 많은 곳을 돌아보느라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경희는 거의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재밌게 잘 다닌다. 이제 모텔 구하는 데는 도사다. 일정도 잘 짠다. 또 맛있는 곳도 잘 찾는다. 거 기에 착하고 예쁘기까지 하다.

글/조남대 전쟁과 평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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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조남대 씨는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경기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중에 있으며 정년퇴직한 부인과 함께 일상에서 탈출, 55일간의 전국여행을 끝마치고 '부부가 함께 떠나는 전국 자동차여행'(북랩출판사 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서 독자들로 부터 아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여정의 하루 하루를 데일리안에 재편집해 연재를 시작하는데 내용안에 부부애가 듬뿍 담겨있어 평소에 '닭살' 돋는 것을 못참는 독자는 조심하시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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