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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외면한 14인의 농성, 아무리 몰인정하다기로...


입력 2017.01.30 10:46 수정 2017.10.16 10:01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13일째 맨 바닥서 태블릿pc 조작 의혹 심의 요구

덴마크까지 가서 찍어대면서 보수 세력 시위는 외면

지난 12월 3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의 송박영신' 10차 촛불집회에서 청와대 행진 행렬이 박 터트리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지난 12월 3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의 송박영신' 10차 촛불집회에서 청와대 행진 행렬이 박 터트리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인디언(호피족이라던가?)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가 올 때까지 제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목표 달성에 대한 확신과 끈질긴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교훈적 이야기일 수도 있고, 막무가내 식 우겨대기 혹은 대책 없는 미련떨기의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박근혜 몰아내기’ 측의 목표는 성공 가능성 쪽으로 훨씬 기울었다. 야당들과 이른바 ‘잠룡’들까지 가세한 대규모 규탄 촛불집회, 언론들의 거의 일치된 비판과 질책, 검찰수사, 특검수사, 국정조사, 나아가 탄핵소추까지 가용 수단 모두가,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동원되어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 만큼 이미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들의 칼 쓰는 솜씨 또한 ‘전광석화’다. 확실한 꼬투리가 잡히자말자, 최소한 수년간은 준비를 해왔던 듯이 일거에 대통령을 유폐시키고 추방 절차를 밟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아직까지도 법원에 의해 확인된 범죄사실이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절대다수 의원들의 찬성으로 진작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탄핵소추안은 급급히 작성됐고, 그 때문에 국회의 탄핵소추위원단이 그 내용의 변경을 시도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지만 난감해 하는 빛은 없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잘 모르겠는데요, 좀 알려주십시오.”

“정말 안 되겠군. 그렇게 큰 죄를 짓고도 반성할 기미조차 안 보이다니.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그 죄를 찾아보지.”

그런 건가?

집권자가 헌정파괴나 국민탄압 혹은 확인된 대형 부패 비리가 아닌, 비리 의혹 만으로 현직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처한 예로는 아마 우리나라가 처음일 것이다. 박 대통령의 ‘억울함’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에게 아주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헌재가 설령 탄핵안을 기각하더라도 특검은 기어이 박 대통령을 범죄인으로 만들 기세다. 특검의 칼날까지 피할 수 있다고 해봐야 정치적 복권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탄핵기각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런 판결이 내려지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왜 야당들과 여당의 일부 세력은 ‘탄핵’에 그처럼 집착했을까? 이미 박 대통령이 4월 퇴임 안을 수용한 뒤였다. 그런데도 국회는 탄핵소추를 강행했다.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것보다는 쫓아내는 게 국회의 권위, 야당 실력자들의 위세를 세우는 길이라고 여겼을까? 이왕 뽑은 칼이어서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마찬가지로 난해한 것이 탄핵소추 이후에도 계속되는 ‘퇴진 요구 촛불집회’다. 탄핵소추로 이미 주홍글씨를 새겨 놓긴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쫓아내는 게 상책이라 여겼을까? 이즈음의 분위기라면 빠를수록 야당의 집권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므로?

콩대를 태워 콩을 익히는데(煮豆燃豆萁)/가마솥 속에서 콩이 우누나(豆在釜中泣)/본래 한 뿌리에서 생겼거늘(本是同根生)/볶아대기 어찌 이리 급하뇨(相煎何太急)

조조(曹操)의 불운했던 아들 식(植)의 칠보시(七步詩)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정서의 대표어는 한(恨)이었다. 역사 속에서 겪은 온갖 고난이 우리의 심성을 그렇게 만들었다고들 했다. DNA에 새겨진 것 같던 그 한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자신감‧당당함을 가지게 되면서 희미해져갔다.

‘행님아’라고, 십 수 년 전 개그맨 김태현과 김신영이 함께 엮는 TV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다. 훌쩍거리는 동생(김신영 분)을 보고 형(김태현 분)이 왜 우느냐고 묻는다. 동생은 어깨를 심하게 들썩거리면서 말한다. “한이 많아서.”

그 때 쯤엔 이미 코미디 소재가 될 정도로 우리의 정서 속에서 한이 지워지고 있었지만 50~60년대에 성장기를 보냈던 사람에겐 그저 웃고 넘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어쨌든 그 한이 비운 자리를 또 다른 감정이 차고앉았다. ‘분노’다. 한은 당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감정상태다. 이에 비해 분노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과거엔 ‘인내’가 우리의 특성이었다면 오늘 날에는 ‘성급함’이 우리의 이미지가 되고 있다. 당당해진 만큼 메말라졌다고 하겠다.

경제가 아주 어렵다고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국가적으로는 엄청나게 풍요로워졌다. 60대 이상 연령층의 눈에 비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정말이지 그 시절 우리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제쯤은 마음의 여유를 가짐직 한데도 현실은 아주 다르다. 욕구 원망 상대적 빈곤감 경쟁심 등이 뒤엉겨 이글거리는 분노의 용광로를 저마다 가슴에 지닌 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늘 조마조마하다.

상식이지만 박 대통령은 성녀(聖女)임을 조건으로 당선된 것이 아니다. 그랬음에도 지금 그는 성녀처럼 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 도대체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고 모두들, 심지어 헌재 재판관까지 집요하게 따졌다. 청와대에 반입된 약품 종류와 그 용도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는가 하면, ‘밤 시간대의 청와대 방문객’에 대한 추궁까지 있었다. 에로틱하거나 샤머니스틱한 상상력은 국회와 검찰과 대중의 공격 본능을 일깨우고 부풀렸다. 이 경우도 ‘인디안의 기우제’처럼 바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될 개연성이 높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인간성의 가장 비열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바닥을 보여준, 인류사의 흉물스런 시궁창이다. 누구에게든 마녀로 지목되거나 고발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정지되고 말았다. 관용은 없었다. 죽음만 있을 뿐이었다. 마녀 판정 기준은 법관에 따라 자의적으로 정해졌다. 예컨대 이런 것이었다. 마녀로 고발된 여자를 강물에 던져 넣는다. 물위로 떠오르면 그는 마녀다.

소문과 추측의 법정에서 온전히 자신을 지킬 길은 거의 없다. 제도로서의 법정에서 박 대통령이 어떤 판결을 받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여론의 법정에서는 이미 중죄를 선고 받았다. 세평과 여론의 법정에서 받는 선고는 영구적 형벌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관용의 마음으로 사안을 찬찬히 뜯어보고 차분히 판단해야 할 텐데, 우리는 너무 급하다. 일단 뭇매를 때리고 난 다음에 죄상을 알아보는 식이다.

우리 사회의 몰인정은 방송통신위원회 점거농성 사태에 대한 위원회와 경찰 측의 대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한국방송회관 로비에서, 이른바 ‘JTBC의 테블릿PC 조작 의혹’에 대한 징계 심의절차 개시를 요구하는 시민 14명이 13일째 농성 중이다. 심의위가 회피적 자세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지만 농성 시민들에 대한 관계 기관들의 대응은 말 그대로 몰인권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식품 등 최소한의 필수적 물품 반입은 겨우 허용되었으나 사람 출입은 전적으로 차단되고 있다는 개인 미디어들의 보도다. 밤에는, 아마 환풍을 하느라 그러겠지만 에어컨보다 더 차가운 바람을 불어넣고 전기공급도 끊는 모양이다. 두 명인가를 제외하면 모두가 여성이고 연로한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방통심의위, 방송회관, 경찰, 지자체 어느 곳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견디다 못하면 나가겠지. 그런 심산인가?

더 절망스러운 일은 언론들의 외면이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와서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태극기집회도 홀대받기는 마찬가지다.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유도성 장려성 보도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해온 언론들이 보수 측의 태극기 집회나, 농성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한다.

자신들이 판단컨대 정의로운 집회가 아니므로 보도할 가치가 없다는 것일까?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이 언론의 보도 기준은 ‘정의’ 여하에 있지도 도덕적 가치에 있지도 않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게 언론의 1차적 의의이고 기능이다. 언론들이 날마다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뉴스와 해설과 논평 속에는 불의한 사건 사고, 가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뉴스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유독 보수진영의 시위를 외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언론들은 당초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및 촛불집회를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뜻이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적대자 응징자의 대열에 동참했다. JTBC 기자가 덴마크까지 가서 정유라를 고발하고 그 장면을 촬영해 보도한 일이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바가 그것이다.

새누리당의 지지세력을 제외한 전체 정치권, 대통령의 휘하에 있는 검찰에다 언론까지 일제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박 대통령의 실인심 정도는 어렵잖게 가늠된다. 아마 박 대통령도 뉘우치고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을 임기 중 신분박탈의 방법으로 풀어내려 한다면 우리의 민주정치는 퇴행할 수밖에 없다.

야당이 박 대통령을 임기 중간에 몰아내고 집권에 성공한다고 하자. 그들에게 저항하는 민중은 없을까? 정치 및 국정운영 과정에서 저항의 핑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이번 탄핵 및 촛불집회 정국 속에서 보수 측은 당당히 뭉치고 함께 소리 지를 수 있는 명분과 기법을 확보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세력이 정권 불인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뿐일까. 진보정권 성립의 유공자들, 특히 군중집회의 주도자들이 전원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빚 갚으라는 청구서가 대통령의 채상위에 수북수북 쌓이게 마련이다. 한국의 민주정은 시들시들하다가 제풀에 주저앉게 될 지도 모른다. 대개 불길한 예감일수록 적중하는 빈도가 높다. 그래서 불안하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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