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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옥고가 법치 재단에 바치는 희생물 되길 바라며


입력 2017.01.22 09:03 수정 2017.01.23 00:19        권혁식 정치부장(부국장) (kwonhs1234@dailian.co.kr)

안종범·조윤선, 구시대적 인치 문화에 나락의 길

그들 덕에 더이상 인치 수족 자임할 사람 없을 것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의혹을 받고 있는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의혹을 받고 있는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규명을 위한 박영수 특검팀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리를 주도한 혐의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1일 구속됐기 때문이다. 특검이 신청한 구속영장에는 이들의 죄목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위증으로 나와 있다. 조 장관은 구속되자마자 사의를 표명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를 수리했다.

조 전 장관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 후보를 도와 중앙선대위 공동대변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중앙선대위 대변인, 인수위 대변인을 맡아 박 대통령 ‘입’ 역할을 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현 정부 출범 당시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입각해 ‘실세 장관’으로 통했으며 2014년 6월 사상 처음으로 여성 정무수석으로 발탁됐다. 이후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하자 박 대통령은 그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다시 등용해 두터운 신임을 재확인했다.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 박 대통령과 인연이 이어져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최연소로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했으며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총격 사망 사건 때는 묵비권을 행사하던 피의자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내 공로를 인정받았다.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의 당사자임에도 오히려 불법 도청을 문제 삼아 위기를 모면했다. 2008년 18대 총선 당시 공천에서 탈락해 여의도 정치권을 떠났지만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의 자문그룹 '7인회' 멤버로 활동한 뒤 2013년 박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안종범 청와대 전 정책조정수석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5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안종범 청와대 전 정책조정수석이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5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김나윤 기자

앞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강제 모금을 위해 대기업들에 거액 기부를 강요했다는 의혹에 따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강요미수 혐의로 지난해 11월6일 구속됐다. 안 전 수석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 2005년부터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2012년 4월부터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4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의원직에서 사퇴했다. 2016년부터는 대통령 정책조정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 대통령을 정조준하고 있는 박영수 특검팀의 수사는 크게 ‘대기업 강제모금’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두 사건의 정점에는 박 대통령이 위치한 가운데 강제모금은 안 전 수석, 블랙리스트는 김 전 실장, 조 전 장관 쪽으로 업무가 진행됐다.

안 전 수석과 조 전 장관은 정치권 입문 전 각각 유명 사립대 교수와 유수 로펌 변호사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둘 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한 번씩 거친 뒤 박근혜 정부의 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은 관료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도 같다. 여의도로 정계 입문해서 몸을 좀 푼 뒤 청와대를 향해 지름길로 갔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지시하는 대로 충직하게 움직인 게 사달이 난 셈이다. 그들의 입장을 선의로 해석한다면, 재단설립을 위해 대기업 상대로 모금을 하고 정부예산 배정에서 배제시킬 리스트를 관리하는 데 대해 크게 죄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법치(法治)를 뛰어넘는, 대통령의 ‘통치행위’ 범주에 들어가는 행위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대통령 비서실이 정권의 안위를 위해선 법적 한계를 뛰어넘어 물불 가리지 않고 지시를 이행해야 유능한 참모로 인정받는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들이 모신 박 대통령과 김 전 실장은 과거 정권에서 횡행하던 인치(人治)의 유산을 안고 있는 인사들이다. 박 대통령은 선친의 어깨 넘어로 보고 배운 것이 그런 세상이며, 김 전 실장도 그런 세상에서 정치검사로서 촉망받는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이런 지도자와 상관을 모시고 청와대의 구태의연한 조직문화에 순응하다 보니 별 거부감 없이 나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안 전 수석은 업무 처리에 장애물도 없었다. 대기업 총수들도 선대의 관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마지못해 응했고, 선선히 맞장구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 전 장관 쪽 업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를 문화체육관광부에 집행하는 과정에서 장관 이하 간부들 반발에 부닥쳤던 것이다. 유진룡 당시 장관을 비롯해 1급 공무원들이 블랙리스트 집행의 부당성을 제기하며 업무를 거부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이에 유 전 장관은 경질됐고, 1급 간부 6명도 김희범 1차관을 통해 내려온 김 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일괄 사표를 내야 했다. 특검은 블랙리스트 자체도 김 전 실장의 지시로 청와대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작성해 문체부로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안 전 수석과 조 전 장관은 관료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정치권으로 바로 간 게 화근으로 지적될 수 있다. 관료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부정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사법 심판과 철퇴를 맞아가며 개선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법치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번 문체부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정상적으로 승진한 관료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위법의 길은 가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여줬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의 티를 충분히 벗지 못한 두 사람은 최고 권력의 화려한 불빛만 보고 달려들었다가 그 지경에 이르렀다. 구시대적 권력 문화에 날개가 녹는 줄도 모르고 단맛에 취해 있다가 결국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옥고는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결코 헛되지 않는 희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그들의 전철을 밟겠다고 인치의 수족(手足)을 자임하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권 족적이 인치시대를 마감하고 법치 정착을 위해 한 걸음 전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권혁식 기자 (kwonhs123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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