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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성매매 역할, 빠져나오기 힘들었죠"


입력 2016.09.30 09:19 수정 2016.10.03 08:06        부수정 기자

'죽여주는 여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

연기 인생 50년…매번 새로운 역 도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으로 분한 윤여정은 "배우가 고생해야 하는 건 사실인데 성매매 장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힘들었다"고 토로했다.ⓒCGV아트하우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으로 분한 윤여정은 "배우가 고생해야 하는 건 사실인데 성매매 장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힘들었다"고 토로했다.ⓒCGV아트하우스

'죽여주는 여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
연기 인생 50년…매번 새로운 역 도전


"나이 칠십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거잖아요. 점점 우울해지고,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습니다."

올해 연기 인생 50년을 맞은 관록의 배우 윤여정(69)에게 '성매매 할머니' 역할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10월 6일 개봉)에서 종로 탑골 공원에서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팔아 먹고사는 65세 여성 소영 역을 맡았다.

영화는 소영이 사는 게 힘들고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 '죽여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성매매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이 영화는 위트 있으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냈다. 삶의 종착지인 죽음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노인과 소외된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담아낸 게 미덕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아픔 있는 여자 소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윤여정의 연기력으로 완성됐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여정은 "저예산 영화라서 힘들 거라는 각오는 했다"며 "배우가 고생해야 하는 건 사실인데 성매매 장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소영 역을 맡은 윤여정은 "무거운 소재를 따뜻하게 그린 점이 좋았다"고 밝혔다.ⓒCGV아트하우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소영 역을 맡은 윤여정은 "무거운 소재를 따뜻하게 그린 점이 좋았다"고 밝혔다.ⓒCGV아트하우스

영화에는 죽고 싶어 하는 노인 세 명이 나온다. 중풍으로 고통받는 노인, 치매에 걸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노인, 사랑했던 사랑의 부재로 인해 외로워하는 노인 등이 그렇다. 이들은 저마다의 상처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다 소영에게 부탁한다. '제발 죽여달라'고. 세 노인이 보여준 고통과 고독은 남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 부분을 건드리며 인생의 쓸쓸함을 짚어주는 동시에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하는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성매매를 통해 죽음이라는 소재를 건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감독도 처음엔 주저했지만 끝내 괜찮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윤여정은 "이 감독도 고민한 부분"이라면서 "이야기를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그리지 않아서 좋았다. 노인·빈곤 문제를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영화에 참여한 의의가 있다"고 했다.

윤여정은 캐릭터를 위해 청치마, 청재킷을 입고 앞머리도 냈다. 이 감독의 아이디어였지만 배우는 반대했단다. 요즘 시대와 안 어울린다는 이유에서다. "나이 70에 머리숱이 있겠어요? 앞머리 낼 것도 없어요. 소영이가 젊게 보이려고 앞머리를 내리는 설정도 너무 처절해 보여서 마음에 안 들었고요. 근데 감독이 몇 가닥만이라도 내리라고 하더라고요. 어쩌겠어요. 내리라는데. 그래서 내렸더니 너무 좋대요. 호호."

배우 윤여정이 주연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성매매 여성을 통해 노인의 죽음을 들여다본다.ⓒCGV아트하우스 배우 윤여정이 주연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성매매 여성을 통해 노인의 죽음을 들여다본다.ⓒCGV아트하우스

이 감독은 청치마, 청재킷을 입은 소영의 모습이 그녀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설정했단다.

이 감독의 욕을 엄청나게 했다는 윤여정은 감독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고 밝혔다. 이 감독과는 '여배우들'(2009),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2012)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이다. "나이 든 배우라서 그런지 어떤 감독의 요구도 다 수용합니다. 배우는 자기 것만 보는데 감독은 전체를 보기 때문이지요. 이 감독은 특히 '디테일'에 목숨 거는데 이 영화에는 그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난해 '계춘할망'(2016)에 이어 이 작품을 찍었다는 그는 "세월 흐르는 것도 잊어버렸다"고 툴툴거렸다. '계춘할망'에서는 제주 해녀 역을,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성매매 여성을 연기했다. 전작에서 몸 고생을 했다면 이번에는 마음고생을 했다. 이렇게 힘든 배역일지 몰랐단다. 그러면서 고생을 시킨 이 감독을 떠올리며 소녀처럼 양 볼을 감쌌다. "감독이 나보고 '말조심'하라고 하더라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네. 민주주의에 살면서 왜 그런지 몰라. 내 맘대로 말할 수도 없고. 어휴."

이 감독에 대한 불평을 귀엽게 털어놓은 그는 이내 이 감독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저는 작업할 때 내용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영화에 출연한 건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이번 영화를 하면서 '윤여정의 파격'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배우는 확고한 연기관을 밝혔다. "단 몇 달 동안 힘들게 사는 건데 '힘들다'고 불평하는 건 진짜 힘든 삶을 사는 분들에게 미안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배역을 택할 때 용감합니다. 이 나이에 잃을 게 뭐 있겠어요. 제가 이미지 생각해서 광고 모델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환갑을 넘어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다짐했어요. 거릴 낄 것도 없고."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윤여정은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고민한다"고 털어놨다.ⓒCGV아트하우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윤여정은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고민한다"고 털어놨다.ⓒCGV아트하우스

남들은 '몸 파는 년'이라고 욕하지만 소영은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여자다. 트랜스젠더, 장애인, 코피노 소년 등에게 손을 내밀 줄 알고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는 생각으로 남의 상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성매매를 통해 엮인 사람들과도 인연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배우는 소영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상처가 많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에 대해 묻지 않아요. 미루어 짐작할 뿐이죠.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해맑게 묻지. 소영이가 처음 만난 아이 민호를 품은 데는 '엄마의 본능'이에요. 아들을 입양 보낸 것에 대한 죄의식도 있고. 따뜻한 사람인 거죠. 성매매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찾아간 것도 소영이의 따뜻한 천성이 작용한 거예요."

소영은 자신의 일이 창피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윤여정은 소영을 '열등의식이 있는 여자'라고 했다. "'나 진짜 상스러운 거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제일 상스럽거든요. 소영이가 성매매 일을 창피하지 않다고 하지만 열등감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소영이가 이름을 바꾼 것도 삶에 지쳐 죽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고 있던 소영은 죽고 싶어하는 노인들을 죽인다. 논쟁의 화두인 '조력 자살'을 온몸으로 연기한 윤여정은 이 상황을 오롯이 이해한 듯했다. "멀쩡한 신사였던 사람이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자존감도 떨어지면서 죽고 싶어진 거죠. 건강해진다는 희망도 없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도 고통스러울 때 소영이를 찾아간 거고. 소영이도 죽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거죠."

공교롭게도 윤여정은 '장수상회'(2014), '계춘할망'(2016), '디어 마이 프렌즈'(2016) 등 최근 작업한 작품에서 '늙음'을 표현했다. 그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분이 있는 유시민 작가의 말을 언급했다.

배우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을 맡았다.ⓒCGV아트하우스 배우 윤여정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성매매 여성 소영 역을 맡았다.ⓒCGV아트하우스

"중풍으로 인한 독립생활과 자존감의 파괴, 치매로 인한 자아 성찰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느끼는 절대적 고독이 노인사의 원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친구들과 얘기하는데 스위스에 가서 평화롭게 안락사하고 싶은 의견과 그래도 생명은 존엄하니까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려요. 확실한 건 없어요. 죽는다는 건 당연히 무섭겠죠. 근데 사람이 태어났으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거고, 어떻게 하면 잘 죽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마냥 오랫동안 사는 게 좋은 건 아닌 듯해요."

윤여정은 윤계상과 실제 트랜스젠더인 안아주와 호흡했다. 윤계상에 대해선 "돈 안 되는 영화를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오르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예의도 바르고 너무 착하다"고 미소 지었다.

안아주에 대해선 "트랜스젠더의 삶과 트랜스젠더도 남들과 똑같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하더라. 똑똑한 여자"라고 했다.

윤여정은 이 영화로 제 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 아시아 섹션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렸을 때 상을 처음 받았을 땐 내가 잘해서 받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며 "상은 운"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1966년 TBC 공채로 연기를 시작한 윤여정은 올해 배우 인생 50년을 맞았다. 소회를 물어봤더니 "세월 따지는 거 싫어하고 창피하다"면서 "50년, 50년 하면 듣는 50년 싫어한다"고 웃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윤여정은 "나이 칠십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서 점점 우울해졌다"며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전했다.ⓒCGV아트하우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윤여정은 "나이 칠십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서 점점 우울해졌다"며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고 전했다.ⓒCGV아트하우스

"음...아주 잘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런데 오래 한다고 해서 잘하는 건 아니에요. 신인이 한 순간에 몰입해서 생생하게 표현하는 연기를 당해낼 사람은 없어요. 이번 영화에서 제가 파격 도전을 했다고 하는데 전 그냥 할 수 있어서 한 겁니다. 그간 너무 많이 나와서 새로운 시도를 할 게 없어요. 상투적인 연기가 몸에 배었겠죠. 이건 제 잘못은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오랜 시간 동안 한 우물을 판 비결을 묻자 그는 "글쎄요"라며 생각에 잠겼다. "일 안 하고 놀면 뭐하겠어요? 부자라서 돈만 쓰면 뭐 재밌나요? 제가 일해서 번 돈이라 소중하고 뿌듯합니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좋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는 친구들 보면 남편한테 물건값 속이고 쓰더라고. 호호."

배우 아닌 다른 삶을 꿈꾼 적은 없었을까. 궁금해졌다. "40대 때는 그런 생각한 적 있는데 이젠 너무 늦어서(웃음)."

이어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건 대중 몫이죠. 기억 안 해주면 그만인 겁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남들이 절 어떻게 기억하는지 알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평가는 상관없어요. 저 자신에게는 '재밌게 살다 갔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90여 편 가까이 출연하며 다양한 삶을 산 그의 차기작은 무엇일까. "저도 몰라요. 그걸 알면 인생이 재미있겠어요?"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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