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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은건데"…팔려나가는 사옥, 무너지는 자존심


입력 2016.06.25 07:46 수정 2016.06.25 09:20        박영국 기자

철강·조선업계 구조조정으로 사옥 잇달아 매각

동국제강이 입주한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왼쪽부터), 삼성중공업 판교 R&D 센터, 서울 중구 다동 대우조선해양 서울 본사 사옥.ⓒ동국제강/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동국제강이 입주한 서울 을지로 페럼타워(왼쪽부터), 삼성중공업 판교 R&D 센터, 서울 중구 다동 대우조선해양 서울 본사 사옥.ⓒ동국제강/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지난 2014년 9월. 현대자동차그룹은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입찰에 10조5500억원이라는 거액을 적어내 낙찰 받았다. 감정가 대비 3배 이상, 낙찰 예상가 대비로는 두 배 가까운 금액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이곳에 105층 타워를 지어 전 계열사들이 입주하는 그룹 통합사옥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그룹 통합사옥 마련은 정몽구 회장의 숙원 사업이었기에 이처럼 막대한 금액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통합 사옥 프로젝트는 기업에 있어 사옥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업무 효율성과 같은 실리적 측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기업의 세를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임직원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기업 규모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기업에게도 사옥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조감도. 가운데 높은 건물이 현대차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105층짜리 통합사옥이다.ⓒ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조감도. 가운데 높은 건물이 현대차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105층짜리 통합사옥이다.ⓒ현대자동차그룹

하지만, 최근 들어 이처럼 상징적 의미가 큰 사옥을 매각하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업황 부진과 실적 악화로 유동성 위기를 맞으며 구조조정에 나선 철강·조선업체들이다.

서울 을지로 한복판에 우뚝 선 페럼타워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동국제강의 상징이었다.

동국제강이 1400억원을 들여 2010년 완공한 연면적 5만5694㎡에 지상 28층, 지하 6층 규모의 이 건물은 서울시내 중심가에 번듯한 사옥을 가지고 있는 소위 ‘잘 나가는 기업’의 자부심을 동국제강에 안겨줬다.

건물 자체의 역사는 짧지만 과거 34년 동안 본사로 사용한 서울 수하동 사옥 부지에 지어졌다는 점에서 상징성도 크다.

철강업계 장기 불황의 여파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에서도 페럼타워는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지난해 1월 철강업계 신년인사회 당시까지만 해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아이템 중 하나로 페럼타워 매각을 검토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안 팔아도 될 것 같고, 팔지 않도록 노력중”이라며 사옥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었다.

하지만 결국 회사채 상환과 운영자금 확보를 위해 그해 4월 페럼타워를 삼성생명에 4200억원에 넘겼다.

동국제강의 한 직원은 “좋은 가격을 받았고, 그 덕에 재무구조가 크게 좋아지면서 올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졸업했으니 잘된 일”이라면서도 본사 사옥의 주인이 바뀐 것에 대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중공업 판교 R&D센터.ⓒ삼성중공업 삼성중공업 판교 R&D센터.ⓒ삼성중공업

그나마 동국제강은 페럼타워에서 5년 넘게 ‘건물주’의 지위를 누렸지만, 아직 새집 냄새가 가시기 전에 쫓겨나거나 세입자 신세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 기업도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8일 자구계획을 발표하며 판교R&D센터 등 비핵심 자산을 매각한다고 밝혔다.

판교R&D센터는 비록 본사는 아니지만 해양플랜트 분야 설계·연구개발 인력과 영업 및 지원부서 인력 등 수도권 근무 인력이 집결한 곳이다. 서울 서초동 삼성타운의 삼성생명 사옥에 세들어 살다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룬 곳이 바로 판교R&D센터다.

삼성중공업은 지하 5층, 지상 8층 규모로 연면적 5만7460㎡에 1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판교 R&D센터를 2013년 1월부터 짓기 시작해 2014년 10월 준공하고 그해 11월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입주 당시 삼성중공업은 “판교 R&D센터 건립을 통해 해양플랜트 기술개발과 설계 역량 강화는 물론, 삼성엔지니어링과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밝힌 바 있다.

연구인력의 근무환경 지원을 위해 화공공정연구실, 기계공정연구실 등 6개의 실험시설을 갖추고 연구원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중장기 프로젝트 연구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특별 연구 공간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입주한지 불과 1년여 만에 구조조정 상황에 몰려 사옥을 매각하는 처지가 됐다.

삼성중공업보다 더 암울한 기업도 있다. 새 사옥에 입주하기는커녕 짓기도 전에 계획이 무산된 대우조선해양이다.

대우조선해양은 당초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삼성중공업 판교 R&D센터와 유사한 기능의 R&D센터를 지을 예정이었으나 지난해 그동안 숨겨뒀던 대규모 적자가 드러나며 전면 백지화했다.

심지어는 10년간 입주해 있던 서울 본사 사옥까지 팔아야 할 처지다. 서울 중구 다동에 위치한 지하 5층, 지상 17층에 연면적 2만4854㎡ 규모의 대우조선해양 본사 사옥은 대우그룹 해체로 서울역 부근 사옥에서 나온 후 2006년부터 대우조선해양 임직원들이 머물던 곳이다.

하지만 자구계획의 일환으로 매물로 내놓았고, 지난달 코람코자산신탁을 최종 매각 협상 대상자로 선정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매각 가격은 1800억원 수준이다.

◇세일 앤 리스백으로 입주 유지…'건물주'에서 '세입자'로


동국제강과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직원들은 사옥 매각 이후에도 변함 없이 페럼타워와 판교 R&D센터, 다동 사옥으로 출근한다.

동국제강은 본사건물 매각 이후에도 새 소유주인 삼성생명과 건물을 임차해 사용하는 ‘세일 앤 리스백’ 계약을 맺었고, 대우조선해양도 코람코자산신탁과 같은 방식의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삼성중공업은 아직 매각 상대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기존 설치된 연구시설이나 삼성엔지니어링과의 접근성 등을 감안해 ‘세일 앤 리스백’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회사가 건물 소유주일 때와 세입자일 때의 느낌은 확연히 차이가 있다. 같은 건물로 출근하며 회사가 잘 나가던 옛 시절 생각에 씁쓸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혹시라도 새 건물주가 간판을 바꿔 달거나 익숙했던 관리직원들을 낯선 이들로 교체한다면 씁쓸함은 더할 것이다.

그 씁쓸함이 그저 사기 저하에 머물 것인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회사를 일으켜 사옥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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