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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담을 단 하나의 키워드 '그레이트'


입력 2016.06.05 16:38 수정 2016.06.05 16:39        데일리안 스포츠 = 임재훈 객원칼럼니스트

포먼 등과 명승부...복싱 기존 패러다임 바꾼 놀라운 기량

흑인 차별에 대한 분노...슬래시 토크와 주먹으로 분출

알리의 복싱이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쇼맨십이었다. ⓒ 게티이미지 알리의 복싱이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쇼맨십이었다. ⓒ 게티이미지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4일(한국시간)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오랜 기간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이던 알리는 지난 3일 새벽 폐렴 증세로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병원에 입원, 잠시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같은 날 밤 상태가 악화되면서 산소 호흡기와 생명 보존장비를 착용하게 됐고, 그 후 몇 시간 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모두의 염원에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챔피언을 향해 전 세계가 추모의 메시지를 쏟아냈다.

알리와 숱한 명승부를 펼쳤던 조지 포먼은 영국 'BBC' 인터뷰에서 "알리를 그냥 복서라고 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며 "알리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했다.

필리핀의 복싱 영웅이자 유력 정치인인 매니 파퀴아오는 성명을 통해 "위대한 인물을 떠나보냈다"며 "복싱이 알리의 재능으로 혜택을 봤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그의 인간성에서 본 혜택에는 비할 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복싱 프로모터로서 숱한 빅매치를 성사시킨 돈 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위대한 자, 사람들의 챔피언인 알리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년의 복싱 스타 한 명에게 보내는 추모의 메시지라고 보기에는 무게감에서 분명한 차이가 느껴지는 애도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알리를 말할 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레이트(Great)다.

알리는 언젠가 방송 카메라 앞에서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I am the greatest)’이라고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타계한 지금에 와서 알리의 그 한마디는 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됐다.

우선 복서로서 알리는 복싱 역사상 그 어떤 선수보다 위대한 선수였다.

애지중지하던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잡아 혼내주려는 요량으로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흑인 소년이 세계 복싱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복서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선수로서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프로복서로 세 차례 헤비급 세계타이틀을 차지했으며 19차례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최고의 복서가 됐다. 그의 프로 통산 전적은 56승(37KO) 5패.

알리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등 헤비급 역사에서 ‘전설’로 통하는 선수들과 벌인 숱한 명승부는 그가 활동하던 1960-70년대로부터 50~60년이 흐른 지금도 복싱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복싱에서 가장 무거운 체급인 헤비급 복서로서 경량급 선수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풋워크와 빠른 몸놀림, 그리고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빠르고 날카로운 펀치는 가히 일품이었다. 알리는 자신의 명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선수였던 셈이다.

알리의 복싱이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쇼맨십이었다.

경기 중이나 인터뷰 중이나 상관없이 ‘슬래쉬 토크’를 내뱉고, 경기 중에는 턱을 들고 안면 커버링을 내린 채 상대에게 도발하고, 상대가 공격해 오면 링에 몸을 기댄 채 상하 좌우로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두 피한 뒤 한 순간 빈틈을 발견해 일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알리 스타일’의 복싱은 그 자체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알리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스포츠 선수가 가져야 할 모든 재능을 타고난 선수였고, 알리의 복싱은 오랜 기간 이어져온 기존 복싱의 패러다임을 바꿔놓기 충분한 것이었다.

알리의 위대함은 복싱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알리는 복싱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위대함을 보여준 인물이다. 알리는 오래 전 노예제도가 폐지됐음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미국 사회에 온몸으로 맞선 인권 운동가였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했던 반전 주의자였다.

알리는 로마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금의환향 한 이후 미국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흑인이란 이유로 입장 거부를 당하자 올림픽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집어 던져버리고 프로 복서로 전향했다. 이때 알리는 ‘더는 검둥이로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는 "노예의 이름을 버리겠다"는 신념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본명인 캐시어스 클레이 대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어떤 복서는 알리와의 대전을 앞두고 ‘나는 알리가 아니라 캐시어스 클레이와 싸우겠다’고 말했다가 경기에서 알리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알리에게 ‘내 이름이 뭐라고? 이 멍청아’라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들어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1960년대 알리는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전 거부로도 고초를 겪지만 이를 기꺼이 무릅썼다. 현역 입영 대상자였던 알리는 휴스턴의 신병 집결지에서 무하마드 알리 대신 호명된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 대신 "나는 이슬람교 성직자로서 미 육군 입대를 거부한다"며 징집을 거부했다.

복싱선수로서, 흑인 인권과 흑백 평등, 그리고 세계 평화를 온 몸으로 실천한 인간으로서 알리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그레이트(Great)’다.ⓒ 게티이미지 복싱선수로서, 흑인 인권과 흑백 평등, 그리고 세계 평화를 온 몸으로 실천한 인간으로서 알리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그레이트(Great)’다.ⓒ 게티이미지

그리고 이후 미국 스포츠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징집 거부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국내에서 흑인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로 하여금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나.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알리의 인터뷰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WBA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한편, 미국 법에 따라 5년의 징역, 그리고 3년간의 선수자격 박탈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끝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 모든 족쇄를 스스로 풀어낸 알리는 링에 복귀해 다시 최고의 복서, 최고의 챔피언의 자리를 되찾는다.

은퇴한 이후에도 알리는 전쟁 중단과 세계 평화를 호소하면서 무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2000만 끼가 넘는 식사를 제공했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파킨슨병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화 최종주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애틀란타 올림픽 남자농구 미국과 유고의 하프타임 때 IOC 위원장은 무하마드 알리에게 그가 오하이오 강에 버린 금메달을 다시 수여했다.

복싱선수로서, 흑인 인권과 흑백 평등, 그리고 세계 평화를 온 몸으로 실천한 인간으로서 알리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그레이트(Great)’다.

임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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