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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통장 잡으려다 은행고객 잡겠네


입력 2016.05.26 09:04 수정 2016.05.26 09:08        이충재 기자

'사용목적' 없이는 신규계좌 개설 안돼…노인‧주부‧취준생 '눈물'

한 은행지점에서 예금주들이 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한 은행지점에서 예금주들이 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자료사진) ⓒ연합뉴스

취업준비생인 김배운씨(26)는 최근 계좌 개설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확실한 사용목적' 없이는 계좌개설이 안된다는 은행의 입장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모아 목돈을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지만, 계좌를 만들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했다.

은행권에서 대포통장을 잡기 위해 계좌개설 요건을 강화하면서 벌어진 창구의 풍경이다. 시중은행들은 지난해부터 계좌를 트려는 고객에게 금융거래목적확인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급여 통장인 경우 재직증명서나 급여명세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단순 입출금 계좌 역시 공과금 영수증 등으로 사용목적을 증빙해야 통장을 개설해 준다. 이는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규정이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통장을 만들 수 있던 은행창구가 익숙한 시민들 사이에선 "계좌개설이 대출만큼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무엇보다 직업이 없는 노인층이나 전업주부, 취업준비생 등에겐 은행 문턱이 더욱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25일 시중은행에서 계좌 개설을 거부하며 배포한 안내 자료ⓒ데일리안 25일 시중은행에서 계좌 개설을 거부하며 배포한 안내 자료ⓒ데일리안

"대포통장 잡겠다고 주부-노인-취준생 격리시킨 정책"

"대포통장 잡겠다고 주부나 노인, 취업준비생들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정책이다.", "근본 해결책을 생각 못하고,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다.", "통장 하나 만드는데 필요한 노고가 대출받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온라인에선 계좌 개설과 관련해 불편을 호소하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높다. 은행 창구에서도 "직원들이 '왜 통장을 안 만들어주냐'며 항의를 받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이에 지난 3월부터 국민·우리·신한·KEB하나·IBK기업 등 은행들이 소액거래 계좌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금융거래 한도계좌'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실제 은행창구에서는 권장하지 않는 분위기다. 고객들에게 '통장 발급절차 강화 안내자료'를 건네며 퇴짜를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25일 오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신한‧국민‧우리은행 등 7개 시중은행 창구를 방문한 결과 계좌개설이 거절된 6개 지점 모두 '한도계좌'를 권하지 않았다.

더욱이 해당 계좌의 실효성 역시 의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루 거래 한도를 은행창구의 경우 100만원, ATM 인출과 이체가 각 30만원으로 묶어놨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압력 강해질수록 '창구문턱' 높아져…"왜 고객에 책임 지우나"

그사이 대포통장 근절 '실적'은 호전됐다. 2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4월까지 월평균 대포통장 발생 건수는 3524건으로 지난해 하반기보다 4.2%(154건) 감소했다. 1~4월까지 월평균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117억원)과 피해 건수(3058건) 역시 지난해 하반기보다 각각 19.9%, 15.9% 줄었다.

금융당국은 대포통장 근절에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장에서 피해예방 실적이 우수한 금융회사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은행창구의 문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권 내에서도 고객에게 책임을 넘기기 보단 시스템 개선 등 금융회사 스스로 예방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에서 고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대포통장을 막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포통장 근절 모범사례'로 꼽히는 농협은행의 경우 20명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모니터링 전담 인력을 배치해 대포통장 개설을 대폭 줄였다.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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